Yeong Hwan Oh 오영환 IRIS Lab, Sungkyunkwan Univ.
Index / Stories / 06
Short story, 2026
2026 In Korean

Be Right Back

프롤로그: 새 게임

이 게임에는 튜토리얼이 없다.

시작 버튼을 누르면 설명 대신 빛이 쏟아진다. 너무 밝고, 너무 시끄럽고, 너무 춥다. 그래서 모두가 울면서 시작한다. 예외는 없다. 이 세계를 거쳐 간 1170억 명이 그랬고, 이 이야기의 두 사람도 그랬다.

한 사람은 1998년 늦봄, 경기도의 한 산부인과에서 울었다. 간호사가 수건으로 감싸 안자 울음을 그쳤고, 어두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른 한 사람은 원래 울 줄을 몰랐다. 그가 살던 곳에는 우는 법이 없었다. 그가 처음으로 운 것은 1954년 겨울, 충청도의 어느 흙벽 집에서였다. 이 세계에 한 번 태어나 보기로 스스로 정한 뒤였다.

이것은 그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아주 많은 불 켜진 창문들에 대한 이야기다.


1. 소리 없는 기억

은호의 기억에는 소리가 없다.

그걸 처음 제대로 알게 된 건 스물여섯 살 설날이었다. 오랜만에 사촌들이 큰집에 모여 할머니 이야기를 하던 참이었다. 사촌 형이 말했다.

“할머니가 마당에서 밥 먹으라고 부르던 거 있잖아. 끝을 이렇게 쭉 올리던 거.”

사촌 누나가 웃으며 흉내를 냈다. 다들 그 목소리에 한꺼번에 웃음을 터뜨렸다. 은호만 웃지 못했다. 그는 그 목소리를 기억하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목소리만 빼고 전부 기억했다.

할머니 집 마당의 흙은 비가 오고 나면 짙은 초콜릿색이 됐다. 대청마루 나뭇결에는 오래된 손때가 반들반들 배어 있었고, 오후 네 시가 되면 감나무 잎 그림자가 안방 벽지 위로 천천히 기어 올라갔다. 장판은 누런 호박색이었는데, 여름이면 맨다리가 쩍쩍 달라붙었다. 그 감촉까지 기억났다. 평상 위에 쪼개 놓은 수박의 붉은 단면, 씨를 멀리 뱉으려고 볼을 부풀리던 사촌 동생의 옆얼굴, 고추 말리던 멍석의 올 하나하나. 사촌들이 마당을 가로질러 뛰어가던 뒷모습은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대로 재생됐다. 형의 파란 반바지, 누나의 양 갈래 머리가 튀어 오르던 각도까지.

그런데 소리가 없었다. 그 모든 장면은 무성영화처럼 흘러갔다. 사촌들이 웃고 있다는 건 알았다. 입 모양이 그랬으니까. 하지만 그 웃음이 어떤 소리였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매미가 울었을 게 분명한 한여름 오후도, 은호의 기억 속에서는 이상하게 조용했다. 기억이 적은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많았다. 다만 전부 사진이었다. 수천 장의 선명한 사진이, 소리 없이.

“너 원래 그랬어.” 그날 저녁 어머니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어릴 때부터 뭘 보면 사진 찍듯이 봤어. 남이 하는 말은 한 귀로 흘리고.”

틀린 말이 아니었다. 초등학교 생활기록부에는 해마다 비슷한 문장이 적혔다. 주의가 산만함. 창밖을 자주 봄. 준비물을 자주 잊음. 은호는 방에 들어갔다가 왜 들어왔는지 잊어버리곤 했고, 신발주머니를 한 학기에 세 번 잃어버렸다. 선생님의 설명은 첫 문장만 들리고 나머지는 창밖 운동장의 플라타너스 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스무 살이 넘어 병원에서 ADHD 진단을 받았을 때, 은호는 이상하게 안도했다. 아, 그게 이름이 있는 거였구나. 내가 게을러서가 아니었구나.

하지만 그 산만함이 데려다준 것들도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지나치는 것들을 은호는 봤다. 보도블록 틈에 핀 민들레, 비 온 뒤 아스팔트에 신호등 불빛이 번지는 모양, 할머니 손등의 주름이 손가락 마디마다 다르게 접히는 방식. 그런 것들이 필요 이상으로 선명하게 들어왔다. 누군가 그런 쓸데없는 것들에만 유난히 공을 들여 해상도를 높여놓은 것처럼.

◇

할머니 집 대문 옆에는 누렁이가 묶여 있었다.

은호네 차가 동네 어귀에 들어서면, 아직 차가 보이지도 않을 때부터 누렁이는 벌떡 일어나 꼬리를 흔들었다. 엔진 소리를 먼저 알아들은 것이다. 은호는 그 엔진 소리를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차창 너머 멀리서 미친 듯이 흔들리던 누렁이의 꼬리는 기억한다. 한여름 오후 대청 그늘에서 잠든 누렁이가 다리를 움찔움찔하며 어딘가를 달리던 모습도.

“꿈꾸는 거여.” 할머니가 그렇게 말했었다. 할머니가 그 말을 했다는 건 기억나는데, 그 목소리는 기억나지 않는다. 은호는 가끔 그게 억울했다. 가장 아끼는 장면들에 전부 음소거 버튼이 눌려 있는 것 같았다.

◇

은호는 만드는 걸 좋아했다. 블록이든 찰흙이든, 손에 잡히는 건 다 쌓아 올렸다.

그중에서도 제일 좋아한 건 우유갑이었다. 할머니는 은호가 온다는 연락을 받으면 씻어 말린 우유갑을 비닐봉지 가득 모아두었다. 은호는 그걸 테이프로 이어 붙여 아파트를 지었다. 커터 칼로 창문을 네모나게 오려내고, 안쪽에 노란 셀로판지를 붙였다. 층마다 베란다를 달고, 옥상에는 이쑤시개로 난간을 세웠다. 그리고 밤이 되면, 우유갑 아파트 안에 손전등을 넣었다.

불을 끈 안방에서 우유갑 아파트의 창문들이 일제히 노랗게 빛났다. 사촌들이 몰려와 들여다봤다. 할머니도 돋보기를 이마에 올리고 한참을 봤다. 입 모양을 기억한다. 아이고, 집집마다 불이 켜졌네. 할머니는 그렇게 말했다.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할머니는 그 우유갑 아파트를 버리지 않았다. 안방 장식장 위, 자개 보석함 옆에 몇 년이나 올려두었다. 먼지가 앉으면 마른 수건으로 닦았다. 창문의 셀로판지가 햇볕에 바래 연한 레몬색이 될 때까지.

할머니가 돌아가신 건 은호가 열일곱 살 때였다. 집을 정리하던 날, 은호는 학원 보충 수업 때문에 가지 못했다. 나중에 들으니 장식장 위의 그것은 다른 잡동사니와 함께 처리되었다고 했다. 아무도 그게 뭔지 몰랐으니까. 은호는 그 얘기를 듣고도 울지 않았다. 그냥 며칠 동안, 이유를 모른 채 자꾸 방에 들어갔다가 왜 들어왔는지 잊어버렸다.

◇

기억은 장소에 붙어 있다고들 한다. 은호도 그랬다. 할머니 동네 근처 국도만 지나가도 머릿속에서 무성영화가 저절로 돌아갔다.

그런데 은호에게는 이상한 장소가 하나 더 있었다. 거기서 무슨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올라서기만 하면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 반응하는 곳. 처음 와본 곳인데도 오래 알던 곳 같은 곳.

아파트 옥상이었다.


2. 해가 지지 않는 도시 〈다른 쪽 이야기〉 첫 번째

저편의 하늘은 짙은 쪽빛이다. 이쪽 눈에 가장 가까운 색으로 말하자면 그렇다. 실제로 그 하늘에는 이쪽 세계의 눈으로는 이름 붙일 수 없는 색이 몇 개 더 섞여 있다. 꿈에서 가끔 스치고, 깨어나면 설명할 단어가 없는 그 색들이다.

해는 하늘 한가운데에서 조금 비껴난 자리에 떠 있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는다. 언제나 그 자리다. 그래서 그 세계에는 아침이 없고, 저녁이 없고, 노을이 없다. 그림자는 늘 같은 방향으로, 같은 길이로 누워 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자세를 바꿔본 적 없는 개처럼.

거리라는 개념이 희미하다. 어딘가를 떠올리면 이미 거기 있다. 도시는 생각으로 지어진다. 누군가 여기 광장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 광장이 생기고, 필요가 사라지면 조용히 풀어진다. 설계와 완공 사이에 시간이 없다. 벽돌 한 장 옮길 일이 없다.

주민들은 서로에게 투명하다. 누가 무엇을 느끼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마주치는 순간 전부 안다. 말은 뜻을 실어 나르지 않는다. 뜻 자체가 건너간다. 그래서 오해가 없고, 비밀이 없고, 거짓말이 없다.

그리고 이름이 없다. 이미 서로를 다 아는데 부를 이유가 없으니까. 이름이란 누군가를 불러야 할 때 생기는 말이다. 멀리 있는 누군가가 필요할 때. 그곳에는 멀리 있는 사람이 없다.

되돌리기는 그 세계의 물리 법칙이다. 깨진 그릇은 다시 붙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깨지지 않은 것이 된다. 아무도 죽지 않는다. 몸은 필요할 때 입고 필요 없으면 벗는 옷에 가깝다. 모두 모든 것을 처음 그 순간의 선명도로 기억한다. 아무것도 흐려지지 않으니, 아무것도 아련해지지 않는다.

주민들은 친절하다. 서로에게 상처를 준 적이 없다. 줄 수가 없다. 모든 상처는 되돌려지니까. 그들의 친절은 따뜻하지만 무게가 없다. 잃을 게 없는 이가 건네는 친절에는 아무것도 들지 않는다.

◇

그 세계에 한 사람이 살았다. 이름이 없는 세계이니, 그냥 그렇게 부르자. 한 사람.

그는 이웃들 사이에서 조금 유별난 축이었다.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 그는 손으로 집을 지었다.

생각만 하면 도시 하나가 통째로 생겨나는 세계에서, 그는 흰 돌을 하나씩 날라 쌓았다. 도시 외곽의 비탈에, 층층이. 아래층의 지붕이 위층의 마당이 되도록. 벽과 벽이 맞닿아 서로 기대도록. 흰 벽에 쪽빛 창틀을 달고, 계단을 구불구불 이어 이웃집 문 앞을 지나가게 했다. 가장 높은 집의 옥상은 넓게 비워두었다. 무엇을 할 자리인지는 그도 몰랐다. 그냥 비워두고 싶었다.

이웃들은 이상하게 여겼다. 왜 손으로 하느냐고. 그리고 왜 집들을 그렇게 붙여 짓느냐고. 그 세계에서는 누구도 벽을 나눠 쓸 필요가 없었다. 아무도 누구를 필요로 하지 않았으니까. 그가 지은 흰 집들은 아주 오랫동안 비어 있었다.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도 몰랐다. 그냥 만드는 게 좋았다. 돌을 하나 올리면 다음 돌을 올릴 자리가 생겼다. 그 순서가 좋았다. 시간이 한쪽으로 흐르지 않는 세계에서, 무언가를 쌓는 동안에만은 시간이 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 같았다. 어제의 벽 위에 오늘의 벽이 올라가는 것. 그는 그 느낌에 이름을 붙이지 못했다. 그 세계에는 ‘진행’이라는 말이 없었다.

둘째, 그는 한 가지를 오래 붙들지 못했다.

계단을 쌓다가 난간이 드리운 그림자에 정신이 팔렸고, 그림자를 보다가 돌 틈에 고인 빛을 들여다봤다. 그러다 보면 계단은 반쯤 쌓인 채로 남았다. 그의 비탈에는 미완성인 것이 가득했다. 반쯤 올라간 벽, 창틀만 있는 창,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는 계단. 이웃들은 그걸 보고 웃었다. 나쁜 웃음은 아니었다. 그 세계엔 나쁜 웃음이 없었다. 다만 정말로 이해가 안 된다는 웃음이었다. 생각하면 한 번에 완성되는 걸, 왜 굳이 저렇게 흩어놓느냐고.

그는 외롭다는 말을 몰랐다. 그 세계에는 그런 단어가 없었다. 다만 흰 집의 가장 높은 옥상에 올라가 움직이지 않는 해를 올려다보고 있으면, 가슴 어딘가에 설명할 수 없는 빈자리가 느껴졌다. 이웃도 있었고, 대화도 있었다. 없는 건 하나였다. 그가 없으면 안 되는 누군가.

◇

그에게는 이상한 점이 하나 더 있었다.

그 세계의 주민들은 잠을 자지 않는다. 정리할 것이 없으니까. 모든 기억이 처음 그대로 제자리에 있는데, 밤새 분류하고 이어 붙일 일이 없다. 그런데 그는 잤다. 흰 옥상의 그늘 아래 누워 눈을 감으면, 가끔 세계가 꺼지고 다른 것이 켜졌다. 그는 그게 무엇인지 몰랐다. 이쪽 말로 하자면 꿈이었다.

어느 꿈에서, 그는 이름 없는 들판을 걷고 있었다. 들판 끝에 물이 있었다. 그는 물가에 앉았다. 그리고 그것을 봤다.

해가 움직이고 있었다.

해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기울었다. 그림자가 길어졌다. 태어나서 한 번도 자세를 바꾼 적 없던 그림자가, 그의 발끝에서 물 쪽으로 늘어났다. 하늘의 쪽빛이 옅어지더니, 가장자리부터 그가 본 적 없는 색으로 번졌다. 주황이, 분홍이, 보라가, 그리고 그 사이의 이름 없는 것들이. 물 위에 그 색이 쏟아졌다가, 조금씩 어두워졌다.

그는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색이 사라져 가고 있다는 것만은 알았다. 그리고 사라지고 있다는 바로 그 이유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해가 물 아래로 완전히 내려갔을 때, 그의 얼굴에서 뭔가가 흘렀다. 그 세계의 몸에는 그런 기능이 없었다. 꿈이라서 가능했다.

그는 깨어났다. 흰 옥상 위, 해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었다. 그림자도 같은 길이였다. 그는 한참 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그러다 비탈 아래로 내려가, 반쯤 쌓다 만 계단 옆에 앉아서, 처음으로 무언가를 설계하기 시작했다.

생각만으로 짓지 않을 것이다. 한 줄씩, 손으로.

해가 지는 세계를.


3. 옥상

은호네가 그 아파트로 이사한 건 2007년 봄, 은호가 아홉 살 때였다.

2004년에 준공된 스물다섯 층짜리 여덟 동. 베이지색 외벽에 동마다 커다란 숫자가 적혀 있었고, 단지 한가운데에는 물이 나오지 않는 분수대와 놀이터가 있었다. 팔백 세대. 은호는 이사 온 첫날 밤, 거실 창에 이마를 대고 맞은편 동의 불빛을 셌다. 백 개까지 세다가 잠들었다.

어른들은 아파트를 두고 곧잘 삭막하다고 했다. 성냥갑 같다고, 다 똑같이 생겼다고, 사람 사는 냄새가 안 난다고. 은호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눈에 아파트는 아름다웠다. 해가 비스듬히 들 때 외벽에 생기는 그림자의 줄무늬, 똑같은 모양의 베란다가 스물다섯 층 위로 반복되며 만드는 리듬, 저녁이면 하나둘 켜지는 창문들. 그리고 그 반복 속에는 전부 조금씩 다른 것들이 있었다. 어떤 집 베란다에는 고무나무가, 어떤 집에는 세발자전거가, 어떤 집에는 이불 빨래가. 똑같은 틀 안에 담긴 전부 다른 삶. 은호는 그게 좋았다. 거대한 우유갑 아파트 안에 진짜 사람들이 사는 것 같았다.

◇

그 아파트에는 한 씨 아저씨가 있었다.

한 씨 아저씨는 103동과 104동 사이의 경비실을 지켰다. 쉰 초반쯤 되어 보였고, 늘 다림질한 회색 제복을 입었다. 명찰에는 ‘한기원’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그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경비 아저씨라고 불렀다. 은호도 처음엔 그랬다.

아저씨는 말이 많지 않았다. 대신 늘 뭔가를 하고 있었다. 화단에 물을 줬고, 아이들 자전거 체인을 고쳤고, 무거운 장바구니를 든 7층 할머니를 보면 말없이 받아 엘리베이터 앞까지 들어다 줬다. 택배를 정리할 때는 집집마다 받는 사람 이름을 소리 내 읽었는데, 틀리는 법이 없었다. 여덟 동, 팔백 세대의 이름을 아저씨는 다 알았다. 몇 호에 누가 사는지, 누가 밤늦게 들어오는지, 어느 집 아이가 이번에 학교에 들어갔는지.

그런데도 사람들은 아저씨를 잘 보지 않았다. 아저씨는 분수대나 놀이터나 화단처럼, 원래 거기 있는 단지의 일부였다. 누가 인사하면 반갑게 받았고, 인사하지 않으면 먼저 고개를 숙였다. 그게 다였다.

은호가 아저씨를 제대로 본 건 이사 온 해 가을이었다.

그날 은호는 학교에서 혼이 났다. 수업 내내 창밖을 보다가 선생님이 부르는 것도 못 들었다. 세 번째로 이름이 불렸을 때에야 고개를 돌렸고, 반 아이들이 웃었다. 선생님은 알림장에 빨간 펜으로 적었다. 수업 태도 불량. 창밖만 봄.

은호는 집에 바로 들어가지 않았다. 놀이터 그네에 앉아 103동 외벽을 올려다봤다. 해가 기울면서 베란다 난간의 그림자가 벽을 타고 비스듬히 미끄러지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으면 알림장 생각이 조금 덜 났다.

“뭘 그렇게 보냐.”

아저씨였다. 물뿌리개를 든 채 그네 옆에 서 있었다.

“그림자요.” 은호가 말했다. “저거, 네 시쯤부터 움직여요. 다섯 시 되면 12층까지 올라가요.”

아저씨는 은호가 가리키는 쪽을 한참 봤다. 그리고 물었다.

“매일 봤냐?”

“네.”

“그래서 오늘 혼났냐?”

은호는 대답하지 않고 알림장이 든 가방을 발로 슬쩍 밀었다. 아저씨는 그네 옆 벤치에 앉았다. 물뿌리개를 발치에 내려놓고, 같이 외벽을 올려다봤다. 그림자는 11층을 지나고 있었다.

“창밖 보는 게 뭐가 나쁘냐.” 아저씨가 말했다. 혼잣말 같았다. “누군가는 봐줘야 예쁜 거야. 아무도 안 보면, 저건 그냥 벽이다.”

은호는 그 말을 오래 기억했다. 무슨 뜻인지는 한참 뒤에야 알게 되지만.

◇

그 뒤로 은호는 학교가 끝나면 경비실 앞을 지나다녔다. 아저씨는 가끔 요구르트를 줬다. 은호는 아저씨에게 우유갑 아파트 얘기를 했다. 셀로판지 창문과 손전등 얘기를. 아저씨는 그 얘기를 몹시 좋아했다. 몇 번이나 다시 해달라고 했다. 이쑤시개 난간은 몇 개였냐고, 셀로판지는 무슨 색이었냐고.

“불 켜진 창문을 좋아하는구나.”

“네. 저 안에 다 누가 살잖아요.”

아저씨는 뭔가 생각하는 얼굴을 하더니, 허리춤의 열쇠 꾸러미를 짤랑 흔들었다.

“옥상 가볼래?”

옥상 문은 늘 잠겨 있었다. 아저씨는 은호를 데려가기 전에 은호 어머니에게 먼저 인터폰을 했고, 104동 꼭대기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몇 번이나 다짐을 받았다. 난간 쪽으로는 한 발짝도 안 된다. 아저씨 손 놓으면 안 된다. 다음에도 꼭 엄마 허락 받고 온다.

철문이 열렸다. 은호는 그 문이 어떤 소리를 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대신 문이 열리는 순간 쏟아져 들어온 하늘의 색을 기억한다.

옥상은 넓고 텅 비어 있었다. 초록색 방수 페인트가 칠해진 바닥, 커다란 물탱크,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은 안테나들. 사방으로 다른 동들의 옥상이 보였다. 그 너머로 동네의 지붕들, 멀리 산 능선, 그리고 하늘. 해가 서쪽 능선에 걸려 있었다.

은호는 아저씨 손을 잡은 채 옥상 한가운데 서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났다.

가슴 어딘가가 먼저 반응했다. 머리보다 먼저. 처음 온 곳인데 오래 알던 곳 같았다. 방에 들어갔다가 왜 들어왔는지 잊어버릴 때의 그 가벼운 착각과는 전혀 달랐다. 낯익은 게 아니라, 애틋했다. 이 옥상이 아니라, 이 옥상과 닮은 다른 어딘가가. 눈앞의 초록 바닥 위로 다른 장면이 겹쳐졌다.

비탈을 따라 층층이 쌓인 흰 집들. 아래층의 지붕이 위층의 마당이 되는, 벽과 벽이 서로 기댄 마을. 흰 벽마다 쪽빛 창틀이 달려 있었다. 하늘은 짙은 파랑이었는데, 그 파랑 사이사이에 은호가 이름을 댈 수 없는 색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가장 높은 흰 집의 옥상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긴 식탁이 차려져 있었고, 누군가 음식을 나르고, 모두가 웃고 있었다. 누구도 떠나지 않았다. 그 잔치는 어제도 있었고 내일도 있을 것 같았다. 영원히, 행복한 채로 계속되는 사회.

이상한 건, 그 사람들이 모두 한쪽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는 거였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은호야.”

아저씨가 잡은 손을 살짝 흔들었다. 장면이 흩어졌다. 은호는 눈을 깜빡였다. 초록 바닥, 물탱크, 안테나. 서쪽 하늘이 막 붉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괜찮냐?”

“……네. 이상해요. 처음 와본 덴데, 와본 것 같아요.”

아저씨는 대답하지 않았다. 은호를 내려다보는 아저씨의 얼굴에, 그때의 은호가 읽지 못한 표정이 스쳐 갔다. 한참 뒤에 은호는 그 표정을 다른 데서도 본 적이 있다고 생각했다. 오래 기다린 사람이 마침내 누군가를 알아볼 때의 얼굴이었다.

◇

둘은 난간에서 멀찍이 떨어진 물탱크 옆에 나란히 앉아 해가 지는 걸 봤다. 하늘이 주황에서 분홍으로, 분홍에서 보라로 번졌다. 아저씨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해가 산 능선 아래로 완전히 내려갈 때까지 눈을 떼지 않았다. 처음 보는 사람처럼. 매일 봤을 텐데.

“아저씨는 노을 좋아해요?”

“우리 집사람이 좋아했지.” 아저씨가 말했다. “지금은 없다.”

은호는 ‘없다’가 무슨 뜻인지 알 만큼은 컸다. 그래서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오래 참았던 걸 물었다.

“아저씨. 저는 가끔 집에 있는데도 집에 가고 싶어요. 그런 거 이상해요?”

아저씨가 은호를 봤다.

“아니. 아저씨도 그래.”

“진짜요? 언제요?”

“매일.”

은호는 아저씨가 농담을 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따라 장난스럽게 물었다.

“아저씨는 어디 살아요?”

아저씨는 한참 대답하지 않았다. 해가 진 자리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말했다.

“멀리. 해가 안 지는 데.”

은호는 웃었다. “노르웨이요? 백야 그런 거?”

아저씨도 따라 웃었다. 그래, 그런 데.

해가 지고 나자, 단지의 창문들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순서도 없이. 102동 7층, 105동 15층, 101동 3층. 은호는 넋을 놓고 봤다. 우유갑 아파트에 손전등을 넣었을 때와 똑같았다. 다만 이번에는 창문 하나하나 안에 진짜 누군가가 있었다.

“불 켜진 창문 하나가 집 하나야.” 아저씨가 말했다. “저 안에서 누가 누구를 기다리고 있어. 밥을 하면서, 문 열리는 소리를 기다리면서. 그래서 불을 켜두는 거야.”

“다 행복할까요?”

“다는 아니겠지.” 아저씨는 솔직했다. “그래도 불은 켜.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날 이후 은호는 몇 달에 한 번씩, 어머니의 허락을 받고 아저씨와 옥상에 올라갔다. 노을을 보고, 불이 켜지는 걸 봤다. 아저씨는 그때마다 해가 완전히 질 때까지 한 번도 먼저 일어나지 않았다.


4. 불꽃 〈다른 쪽 이야기〉 두 번째

해가 지는 세계를 만드는 데 필요한 것은 생각보다 많았다.

해가 지려면 해가 움직여야 했고, 해가 움직이려면 시간이 한 방향으로 흘러야 했다. 시간이 한 방향으로 흐르려면 되돌리기를 없애야 했다. 그는 되돌리기를 뺐다. 그러자 깨진 것은 깨진 채로 남게 됐다. 그게 조금 무서웠다. 하지만 되돌릴 수 있는 노을은 노을이 아니었다.

그는 중력을 정했다. 중력 상수는 한 번 정한 뒤로 끝까지 손대지 않았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게 했고, 빛의 속도에 한계를 두었고, 별들을 아주 멀리, 서로 쉽게 닿을 수 없을 만큼 멀리 흩어놓았다. 그리고 행성 하나를 살짝 기울여, 그 위의 해가 매일 지도록 했다. 꿈에서 본 들판과 물가가 거기 있었다.

작업은 느렸다. 그는 여전히 한 가지를 오래 붙들지 못했다. 대륙을 만들다가 해안의 조약돌에 빠졌고, 조약돌을 만들다가 그 사이에 끼인 조개껍데기의 무늬를 그렸다. 숲을 만들다가 나뭇잎 하나가 오후 네 시에 벽에 드리우는 그림자를 며칠이고 다듬었다. 움직이는 그림자. 그가 살던 세계에는 없던 것. 그는 그림자가 벽을 타고 기어오르는 속도를 백 번도 넘게 고쳤다.

그래서 이 세계는 쓸데없이 아름답다. 아무도 보지 않을 보도블록 틈의 민들레, 할머니 손등의 주름, 비 온 뒤 아스팔트에 번지는 신호등 불빛. 아무 쓸모도 없는 곳의 해상도가 말도 안 되게 높은 건, 설계자가 원래 그런 데 마음을 빼앗기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산만함은 이 세계의 결함이 아니라 문체였다.

◇

문제는 이 세계를 볼 사람이었다.

처음에 그는 당연히 의식도 짤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리 법칙을 짰고, 빛을 짰고,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게 하는 것도 짰으니까.

빌드 #1은 돌멩이 수준이었다. 반응은 있는데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빌드 #200쯤에서 처음으로 한 캐릭터가 배고프다고 말했다. #1,300에서는 나는 지금 슬프다고 말했고, #3,000을 넘기자 그가 던지는 어떤 질문에도 완벽하게 대답했다. 너는 누구냐고 물으면 자기 이야기를 했고, 아프냐고 물으면 아프다고 했고, 죽는 게 무섭냐고 물으면 조금 떨면서 무섭다고 했다.

그런데 그는 로그 옆에 매번 같은 메모를 남겼다.

아무도 없다.

대답은 완벽한데, 그 대답 뒤에서 아무도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불 꺼진 집에서 녹음된 목소리만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처리되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경험되지 않았다.

빌드 #4,000 근처에서 그는 손을 멈췄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 모든 빌드 중 어디에 누가 들어 있는지, 바깥에서 확인할 방법은 애초에 없었다. 행동은 똑같으니까. 그가 확실히 아는 ‘안에 누가 있는 것’은 딱 하나, 자기 자신뿐이었다.

그렇다면 방법도 하나뿐이었다. 자기 것을 나누는 것.

◇

두 세계 사이에는 경계가 있다. 저편에서 이쪽으로 물리적으로 건너올 수 있는 건 없다. 코드는 보낼 수 있지만, 안에 있는 그것은 코드가 아니다. 경계가 얇아지는 순간은 하나뿐이다. 양쪽이 모두 잠든 밤. 그때 창문 하나가 열린다.

사실 첫 번째 건너감은 그가 의도한 게 아니었다.

그는 이 세계를 처음 꿈에서 봤다. 꿈을 꾸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 꿈 안에 있다. 그도 그랬다. 그는 꿈속에서 들판을 걸었고, 물가에 앉았고, 해가 지는 걸 봤다. 그리고 깨어났다.

그렇게 세계를 짓던 어느 날, 빌드를 열었을 때 이상한 일이 있었다. 물가의 한 자리에서 무언가가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꿈에서 깨어날 때, 그의 바라봄 일부가 거기 남아 있었던 것이다. 들판을 보고, 물을 보고, 지는 해를 보던 그 시선이, 주인이 떠난 뒤에도 그 자리에 앉아 계속 보고 있었다.

개발 기록에서 가장 긴 공백이 여기 있다. 날짜가 한참을 건너뛴 다음, 한 줄이 적혀 있다.

처음으로, 내가 만든 것이 나를 쳐다봤다.

그는 그것을 처음에 카메라라고 불렀다. 세계가 누군가에게 ‘보이는’ 지점. 그 안을 통과할 때에만 빛의 파장이 붉은색이 되고, 공기의 떨림이 노랫소리가 되는 곳. 나중에는 불꽃이라고 불렀다. 그게 더 맞는 이름 같았다.

◇

그다음부터는 의도였다. 그는 남겨진 시선을 오래 관찰하다가, 그것이 정말로 불꽃처럼 움직인다는 걸 알게 됐다. 불꽃은 나눠도 줄지 않는다. 초 하나로 다른 초에 불을 붙여도, 처음 초의 불은 그대로다. 그는 자기 불꽃에서 불을 옮겨 붙이기 시작했다.

임포트 로그는 건조하다.

원본: 나
방식: 분할 후 설치
원본 손실: 없음
부작용: 설치된 불꽃이 원본을 기억하지 못함. 원본과 다르게 타기 시작함. 되돌릴 수 없음.

부작용 항목 옆에 손글씨가 있다.

처음엔 버그인 줄 알았다. 분명 내 불인데, 옮겨 붙은 불꽃은 나를 모르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심지 모양이 다르고, 초의 재질이 다르고, 바람 부는 방향이 달라서, 몇 번 흔들리고 나면 더는 내 불이 아니었다.

고치려다 말았다. 생각해보니 이게 내가 원한 거였다. 나를 여러 개 만들고 싶었던 게 아니라, 내가 아닌 누군가를 만나고 싶었던 거니까.

불꽃은 창문을 통해서만 건너올 수 있다. 그래서 설치는 언제나 잠결에 이루어진다.

갓 태어난 아기가 하루의 대부분을 자는 이유가 그것이다. 설치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꽃은 한 번에 옮겨지지 않고, 여러 밤에 걸쳐 조금씩 자리를 잡는다. 그동안 아기의 창문은 어른보다 훨씬 넓게 열려 있다. 잠든 아기가 이유 없이 웃을 때가 있다. 배냇웃음. 옛사람들은 삼신할머니가 어르고 가는 거라고 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설치가 진행되는 동안 아기는 아직 저편과 반쯤 닿아 있고, 저편의 누군가가 창문 너머로 들여다보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첫 울음에도 이유가 있다. 창문에서 흘러들던 희미한 빛에만 익숙하던 불꽃이, 처음으로 이 세계의 실시간 데이터에 연결되는 순간이다. 너무 밝고, 너무 시끄럽고, 너무 춥다. 누구라도 운다. 그리고 우는 아기를 달래는 방법은 거의 전부 창문 쪽을 흉내 낸다. 어둡게 하고, 조용히 흔들고, 낮게 흥얼거리고, 따뜻하게 감싼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안다. 이 아이가 방금 어디서 왔는지.

모든 불꽃이 한 곳에서 왔다는 사실은 다른 것들도 설명해준다. 별이나 수평선이나 모닥불 앞에서 사람들이 문화도 시대도 가리지 않고 똑같이 조용해지는 건, 그들의 시선이 원래 그의 시선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아름답다고 여긴 것을 그들도 아름답다고 여긴다. 취향이 비슷해서가 아니라, 같은 불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

그는 불꽃을 받을 조건을 정해야 했다. 설정 파일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조건: 사람
…근데 현관에서 기다리는 개를 보면, 가끔 이 조건이 맞는지 잘 모르겠다. 나중에 다시 볼 것.

그리고 그 아래, 한참 뒤에 추가된 줄.

방금 대청 그늘에서 잠든 개가 다리를 움찔거리며 어딘가를 달렸다. 쟤는 무슨 꿈을 꾸는 걸까.

◇

그다음에 일어난 일은 그가 설계하지 않은 것이었다.

불꽃을 받은 이들이 만들기 시작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처음엔 비를 피할 지붕이었다. 그다음엔 불을 지키는 둘레였고, 그다음엔 마을이었다. 그들은 노래를 지었고, 이야기를 지었고, 거둔 것을 삭히고 끓이고 나눠 먹는 법을 지었다. 다리를 놓았고, 달력을 만들었고, 서로에게 편지를 썼다. 김치찌개는 그가 만든 게 아니다. 그는 배추와 고추와 불을 만들었을 뿐이다.

몇몇은 이 세계의 규칙을 숫자로 받아 적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숫자들이 이상하게 아름답다고, 발명한 게 아니라 발견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들은 그가 쓴 문장의 문체를 알아보고 있었다.

나는 규칙 몇 개만 만들었다. 나머지는 그들이 만들었다. 노래도, 다리도, 달력도, 국수도.

만드는 걸 좋아하는 건 원래 내 버릇이다. 불을 나눠줄 때 그것도 같이 옮겨간 모양이다. 그들은 만들면서 세계를 키운다. 내가 짠 적 없는 것들이 계속 생겨난다.

창발. 이 단어를 처음 써본다. 내 세계에는 필요 없던 단어다.

어느 날 그는 두 사람이 한 지붕 아래서 사는 것을 봤다. 서로 다른 불꽃 두 개가, 하나의 빛만으로는 부족한 밤을 함께 밝히고 있었다. 얼마 뒤 둘 사이에 새 불꽃이 설치되었다. 두 사람은 그 작은 불꽃이 울 때마다 번갈아 일어났다. 어두운 방에서, 조용히 흔들며, 낮게 흥얼거리며.

가정. 서로를 필요로 하는 가장 작은 단위. 내 세계에는 없는 것.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둘은 서로를 비추기로 했다. 한정된 빛을, 하필 서로에게 쓰기로. 그걸 스스로 골랐다. 이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선택이 이것 같다.

◇

그리고 아주 긴 시간이 지난 뒤, 그는 그들이 집을 위로 쌓아 올리는 걸 봤다.

벽과 벽을 맞대고, 아래층의 천장이 위층의 바닥이 되도록. 한 건물 안에 수백 개의 창문. 수백 개의 가정.

그는 한참을 웃었다고 적었다. 그가 저편의 비탈에 손으로 쌓던, 아무도 살지 않던 흰 집들. 그들은 그걸 회색 콘크리트로, 훨씬 높이, 훨씬 빽빽하게 지었다. 그리고 거기서 정말로 살았다. 벽 너머로 이웃의 발소리를 들으며, 서로의 불빛에 기대어.

삭막하다고들 한다. 나는 모르겠다. 밤에 보면, 내가 본 것 중에 제일 따뜻하다.


5. 암흑의 숲

은호는 2019년 여름에 입대했다.

입대 전날, 은호는 경비실에 들렀다. 아저씨는 그사이 많이 늙어 있었다. 머리가 하얗게 셌고, 이제는 무거운 장바구니를 직접 드는 대신 카트를 끌어다 줬다. 은호가 인사하자 아저씨는 한참 은호를 봤다. 그리고 경비실 서랍에서 뭔가를 꺼냈다. 요구르트 두 개였다. 은호가 열 살 때처럼.

“잘 다녀와라.”

“다녀오겠습니다.”

그 말에 아저씨가 웃었다. 이상할 만큼 환하게.

“그 말 좋지.”

“네?”

“다녀오겠습니다. 떠나는 말인데, 돌아온다는 말이 들어 있잖아. 세상에 그런 인사가 또 있나 몰라.” 아저씨는 요구르트 뚜껑을 까서 은호에게 건넸다. “아저씨가 제일 좋아하는 말이다.”

◇

훈련소를 거쳐 강원도의 한 부대로 배치됐다. 산이 깊었다. 밤이면 막사 밖이 완전히 캄캄했다. 은호는 그 어둠이 낯설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불빛 하나 없는 밤을 본 적이 없었다.

부대에는 작은 도서관이 있었다. 철제 책장 몇 개를 진중문고가 채우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 누가 두고 갔는지 모를 건축책 몇 권이 섞여 있었다. 은호는 거기 빠졌다. 책 한 권을 끝까지 읽는 게 늘 어려웠는데, 건축책은 달랐다. 도면과 사진 사이를 헤매는 건 창밖을 보는 것과 비슷했다. 문장을 놓쳐도 그림이 붙잡아줬다. 주말이면 은호는 그 책장 앞 바닥에 앉아 몇 시간씩 사진을 들여다봤다.

그중 한 권에서 은호는 어느 건축가의 이야기를 읽었다. 스물몇 살의 그 건축가는 동방으로 긴 여행을 떠났다. 그리스에서 오래된 신전과, 지중해 햇빛 아래 하얗게 칠해진 집들을 봤다. 그는 돌아와서 평생 흰 벽을 사랑했다. 그리고 훗날, 사람들을 한 건물 안에 층층이 쌓아 올리는 집을 설계했다. 수백 세대가 한 지붕 아래 사는 커다란 주거 건물. 그 건물의 옥상에는 아이들을 위한 얕은 물놀이장과 달리기 트랙과 야외 무대가 있었다. 옥상이 모두의 마당이 되도록.

은호는 그 페이지를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흑백 사진 속 옥상 위로 손가락을 얹었다. 그리스의 흰 집과, 층층이 쌓인 집과, 모두의 마당이 된 옥상. 열 살 때 104동 옥상에서 겹쳐 보였던 그 장면이 거기 있었다. 은호가 자란 동네의 베이지색 아파트들도, 먼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어딘가에서 그 흰 벽에 닿아 있을지 몰랐다. 삭막하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몰랐던 그 아름다움이, 한 줄로 이어져 있었다.

그날 밤 은호는 수첩에 적었다.

아파트는 산비탈의 흰 마을을 세로로 세운 것이다. 색만 다르다.

◇

같은 책장에서 은호는 『삼체』를 발견했다. 두꺼운 책이었다. 끝까지 읽을 자신이 없었는데, 이상하게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은호를 가장 오래 붙잡은 건 암흑의 숲이라는 생각이었다. 우주는 어두운 숲이고, 모든 문명은 총을 든 사냥꾼이다. 다른 존재를 발견하면 먼저 쏘아야 한다. 상대가 선한지 알 수 없고, 알아낼 시간도 없으니까. 그래서 살아남는 문명은 모두 숨는다. 불을 켜는 자는 죽는다.

차갑고, 논리적이었다. 반박하기 어려웠다. 은호는 그 논리가 무서웠다. 틀려서가 아니라, 너무 그럴듯해서. 어쩌면 우리가 사는 세상도 그렇게 짜여 있는 게 아닐까. 서로를 믿지 못하게, 먼저 숨고 먼저 쏘게. 누군가 그렇게 제약을 걸어둔 세계라면.

그해 가을, 새벽 경계 근무를 서던 밤이었다. 초소에서 내려다보면 산 너머 저 멀리 작은 읍내의 불빛이 보였다. 가로등 몇 개, 편의점 간판 하나, 그리고 아파트 두어 동의 창문들. 새벽 세 시였는데도 몇몇 창문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은호는 그 불빛을 오래 봤다. 암흑의 숲이라면, 저건 미친 짓이었다. 이 넓은 어둠 속에서 저렇게 불을 켜두다니. 나 여기 있다고 광고하는 꼴이었다.

그런데 저 창문 안에 있는 건 사냥꾼이 아니었다. 늦게 들어올 누군가를 기다리며 켜둔 불일 수도 있었다. 밤중에 깬 아이를 달래느라 켠 불일 수도, 열이 나는 가족의 이마를 짚어보느라 켠 불일 수도 있었다.

불 켜진 창문 하나가 집 하나야. 저 안에서 누가 누구를 기다리고 있어.

은호는 그 순간 알았다. 아파트 단지는 암흑의 숲의 정반대였다. 수백 개의 창문이 한꺼번에 불을 켜고 있다. 아무도 숨지 않는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벽 너머의 누군가가 자기를 해치지 않을 거라고 믿으며 잠든다. 그건 논리가 아니었다. 논리로 따지면 바보짓이었다.

근무를 마치고 돌아와 은호는 수첩에 적었다.

나는 바보들의 숲에 살고 싶다. 먼 곳의 불빛을 보면 손을 흔드는 바보들. 모르는 이에게도 호감부터 갖는 바보들. 손해를 보더라도 착하게 구는 바보들.

며칠 뒤 은호는 도서관의 낡은 과학 잡지에서 오래된 이야기를 하나 읽었다. 1977년, 사람들이 먼 우주로 탐사선 두 대를 보냈다. 거기에 금으로 도금한 레코드판을 실었다. 파도 소리, 빗소리, 아기 울음소리, 입맞춤 소리, 여러 나라의 음악, 그리고 쉰다섯 개 언어로 녹음한 인사말. 그중에는 한국어도 있었다. 안녕하세요.

누가 들을지도 모르는 채로. 듣는 누군가가 친절할지 아닐지도 모르는 채로. 사람들은 어둠에 대고 그렇게 외친 것이다. 우리 여기 있어요. 안녕하세요.

암흑의 숲의 논리로 보면, 인류가 한 일 중 가장 멍청한 짓 가운데 하나였다. 은호는 그 기사를 오려 수첩에 붙였다. 그리고 그 아래 적었다.

바보들. 좋다.

◇

이듬해 봄에는 휴가가 전부 막혔다. 온 나라가 조심하던 해였다. 은호는 몇 달 동안 부대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가을이 시작될 무렵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머니는 한참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한 씨 아저씨가 돌아가셨다고. 봄부터 몸이 안 좋아 일을 그만두셨는데, 결국. 장례는 조촐하게 치렀다고 했다. 가족이 거의 없는 분이라서.

은호는 공중전화 부스 안에 한참 서 있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어머니가 몇 번 그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하지 못했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나왔는데. 다녀왔습니다를 들어줄 사람이 없어졌다.

그날 밤 은호는 처음으로 되돌리기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입대 전날로, 딱 한 번만. 요구르트를 받던 그 순간으로. 그러면 조금 더 오래 앉아 있을 텐데. 조금 더 오래 아저씨 얼굴을 볼 텐데.

◇

몇 주 뒤 휴가가 풀려 처음 집에 갔을 때, 은호는 104동 엘리베이터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관리사무소에서 붙인 부고 공지가 아직 떼어지지 않은 채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로, 벽 한 면을 가득 메운 포스트잇들이 있었다. 노랑, 분홍, 하늘색. 삐뚤빼뚤한 글씨와 크레파스 글씨와 또박또박한 어르신 글씨.

아저씨 덕분에 우리 애가 자전거를 배웠어요. 감사했습니다.

매일 아침 인사해주셔서 하루가 좋았어요.

장바구니 들어줘서 고마웠수. 7층 할머니가.

아저씨 보고 싶어요 (경비실 그림과 웃는 얼굴)

이름을 이제야 알게 되어 죄송합니다. 한기원 님, 편히 쉬세요.

좋은 이웃이셨습니다.

사람들은 그제야 아저씨의 이름을 알았다. 십육 년 동안 매일 봤는데.

집에 가자 어머니가 작은 쇼핑백 하나를 건넸다. 아저씨가 일을 그만두던 날 맡기고 갔다고 했다. 은호가 휴가 나오면 전해달라고.

쇼핑백 안에는 낡은 스케치북 한 권과 쪽지 한 장이 있었다.

스케치북에는 연필 그림이 가득했다. 산비탈에 층층이 쌓인 흰 집들. 아래층의 지붕이 위층의 마당이 되고, 계단이 이웃집 문 앞을 지나 구불구불 올라가는 마을. 하늘은 색연필로 칠해져 있었는데, 쪽빛 사이사이에 은호가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색이 섞여 있었다. 색연필 세트에 그런 색이 있었을 리 없는데. 그림 속 그림자들은 전부 같은 방향, 같은 길이로 누워 있었다.

그리고 많은 그림이 미완성이었다. 반쯤 그리다 만 벽, 창틀만 있는 창,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는 계단.

마지막 장에만 완성된 그림이 있었다. 해 질 녘의 이 아파트 단지. 여덟 동의 창문이 전부, 하나도 빠짐없이 노란 색연필로 칠해져 있었다. 그림 아래 작은 글씨로 한 단어가 적혀 있었다.

집.

쪽지는 두 줄이었다.

은호야. 미완성이어도 괜찮다. 이 세상도 아직 다 안 만들어졌어.
다녀올게.

은호는 그 쪽지를 오래 들여다봤다. 다녀올게. 떠나는 사람이 하는 말이었다. 돌아올 사람이 하는 말이었다.

아저씨는 어디를 다녀온다는 걸까.


6. 바보들의 숲 〈다른 쪽 이야기〉 세 번째

설계 초기, 그는 이 세계의 가장 큰 규칙 하나를 정해야 했다. 별들을 멀리 흩어놓았으니, 언젠가 누군가는 먼 곳의 빛을 발견할 것이다. 그때 그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설계 문서에는 두 개의 선택지가 적혀 있다.

먼 곳의 빛을 발견했을 때
A. 숨는다. 먼저 쏜다. (생존에 유리. 안정적. 조용한 우주.)
B. 손을 흔든다. (생존에 불리. 비효율적. 시끄러운 우주.)

A 옆에는 꽤 긴 계산이 붙어 있다. 논리적으로 흠잡을 데가 없다. 먼 훗날 이쪽 세계의 한 작가가 바로 그런 우주를 소설로 써서 많은 사람을 서늘하게 만들게 된다. 제약을 끝까지 밀어붙이면 도착하는 세계.

그는 A에 줄을 긋고 B에 동그라미를 쳤다. 사유는 한 줄이다.

바보들이 사는 세계를 보고 싶다.

물론 그건 기울기일 뿐이었다. 그는 불꽃들에게 자유를 줬고, 자유에는 A를 고를 자유도 들어 있었다. 이 세계에도 숨는 이들이, 먼저 쏘는 이들이 있었다. 그는 막지 않았다. 막으면 B를 고르는 것도 더는 선택이 아니게 되니까. 다만 세계를 아주 조금 기울여 두었다. 모르는 얼굴을 보면 먼저 경계하기보다 먼저 궁금해하도록. 갓난아기가 처음 보는 얼굴에게도 웃는 건 그 기울기 때문이다.

한참 뒤, 설계 문서의 여백에 메모 하나가 추가됐다.

1977년. 그들이 어둠에 대고 인사를 보냈다. 쉰다섯 개 언어로. 빗소리와 아기 울음과 입맞춤 소리를 금판에 새겨서. 누가 들을지도 모르면서.

바보들.

내가 보고 싶었던 게 이거였다.

◇

이제 크레딧 이야기를 해야 한다.

이 세계에서 죽음은 로그아웃이 아니다. 불꽃의 시선이 꺼지는 것이다. 세계는 계속 돌아간다. 다른 불꽃들이 아직 켜져 있으니까. 그다음은 엔딩 컷씬이다. 모두에게 같은 파일 하나인데, 1인칭으로만 재생되고 바깥에서는 열리지 않는다.

컷씬이 끝나면 크레딧이 올라간다. 자기 이름과, 남겨진 사람들이 써준 한 줄. 그리고 출연 기록. 내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나왔던 장면들. 무심코 잡아준 엘리베이터 문이 누군가의 최악의 날에 유일하게 괜찮았던 순간이었다는 것. 지나가며 한 칭찬 한마디를 누군가 이십 년 동안 간직했다는 것. 사람들은 크레딧에서 가장 많이 운다. 자기가 생각보다 훨씬 많은 장면에 나왔다는 걸 알게 돼서.

그리고 타이틀 화면. [다시 하기], [머무르기], 그리고 아직 플레이 중인 누군가를 사랑했다면 나타나는 [기다리기].

대부분은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조용히 화면을 본다. 그런데 아주 오래전, 크레딧 도중에 화면 너머를 향해 말을 건 사람이 있었다.

“당신은 어디 살아요?”

그는 한참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다 버튼도 없던 시절이라, 직접 그 사람의 불꽃을 들어 자기 세계로 데려갔다. 보여주고 싶었다고 적었다. 자기가 사는 곳을,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처음에 그 사람은 황홀해했다. 처음 보는 색들, 온도가 있는 소리, 떠올리면 닿는 거리. 몸이 아프지 않았고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해가 지지 않는 하늘을 오래 올려다봤다. 지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이웃과 헤어질 때마다 작별 인사를 했고, 이웃들은 웃으며 왜 그러냐고 물었다. 곧 또 볼 텐데. 편지를 쓰고 싶어 했지만 그 세계의 말은 즉시 건너가서 편지가 될 수 없었다. 가끔 먼저 떠난 개 이야기를 했다. 현관에서 발소리를 먼저 알아듣던 개. 그 세계에는 잃어버린 것들을 모아두는 보관소가 없었다. 잃는 게 없는 곳에는 그런 장소가 필요 없으니까.

그리고 어느 날, 그 사람은 그의 흰 옥상에 올라와 물었다.

“여기서는 누구를 기다려요?”

아무도.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그는 대답했다.

“그럼 누가 나를 기다려요?”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사람이 가지고 온 애틋함은 받는 사람 주소가 없는 편지처럼 그 세계를 떠돌았다.

얼마 후 그 사람은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그는 붙잡지 않았다. 그 사람은 이쪽으로 돌아와 [다시 하기]를 눌렀다. 기억은 전부 초기화되었다. 그런데 다음 생으로 넘어가는 애틋함 안에, 이번엔 전에 없던 것이 하나 섞여 있었다. 해가 지지 않는 도시에 대한 애틋함. 쪽빛 하늘 아래 흰 옥상에 대한.

처음으로 누군가 내 세계를 그리워했다. 거기서 평생 산 나도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그 불꽃이 어디서 다시 태어났는지 찾아보지 않았다. 찾을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불꽃은 이제 그 사람 것이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게 두 가지 있었다.

하나. 저편에서 지내는 동안 그 불꽃은 저편의 방식으로 기억하는 데 익숙해졌다. 그 세계의 말은 소리 없이 뜻으로만 건너간다. 그러니 다음 생에서 한동안, 그 사람의 기억에는 소리가 남지 않을 것이다. 장면은 사진처럼 선명하게 남는데, 목소리는 남지 않을 것이다.

둘. 저편에 한 번 다녀온 그 불꽃은 창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을 것이다. 낮에도 조금 열려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은 수업 시간에 자꾸 창밖을 볼 것이고, 해 질 녘이면 이유 없이 먹먹해질 것이고, 가끔은 깨어 있는 채로 꿈을 꿀 것이다. 그는 그걸 고칠 수 없었다. 고칠 수 있었다 해도 그러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 열린 틈으로 들어오는 빛이, 그 사람에게 남들이 지나치는 것들을 보여줄 테니까.

그래도 첫 번째는 미안했다. 그래서 노트 한구석에 적어두었다.

그 사람이 언젠가 소리를 기억하게 되기를. 누군가 그 소리를 채워주기를.


7. 옥상 잔치

은호는 2021년 봄에 전역했다.

복학 대신 휴학을 한 학기 더 냈다. 전공은 경영학이었다. 부모님이 무난하다고 해서 고른 과였다. 건축을 다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은 군대에서부터 했지만, 막상 나오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는 늘 무언가를 시작했다. 단지 모형을 만들겠다고 폼보드를 샀고, 동네 건물을 스케치하겠다고 노트를 샀고, 블로그를 열었다. 그리고 대부분 반쯤에서 멈췄다. 책상 서랍에 미완성인 것들이 쌓였다. 반쯤 자른 폼보드, 세 장 그리다 만 스케치북, 글이 두 개뿐인 블로그.

만들고 싶은데 만들지 못하는 사람. 은호는 자기를 그렇게 생각했다. 세상은 만드는 사람들이 움직인다. 집을 짓는 사람, 다리를 놓는 사람, 노래를 짓는 사람. 자기는 그들이 만든 걸 보고 좋아하기만 하는 사람이었다. 옛날 기억이나 들춰보고, 남들이 삭막하다는 아파트를 혼자 좋아하는 사람. 세상엔 그런 사람도 있는 거지, 하고 넘기려 해도 잘 넘겨지지 않았다.

스스로를 어떻게 다독여야 할지 몰랐다. 그럴 때면 아저씨의 스케치북을 꺼냈다. 미완성 그림들을 넘기다가 마지막 장의 불 켜진 단지에서 멈췄다. 미완성이어도 괜찮다. 이 세상도 아직 다 안 만들어졌어. 그 말이 위로인지 숙제인지, 은호는 알 수 없었다.

◇

그해 여름 끝 무렵, 은호는 달력을 넘기다가 날짜 하나에 눈이 멈췄다. 아저씨의 1주기였다.

그날 밤 은호의 머릿속에 그림 하나가 떠올랐다. 104동 옥상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 돗자리가 깔려 있고, 누군가 음식을 나르고,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모두 해가 지는 쪽을 보고 있다. 열 살 때 그 옥상에 겹쳐 보였던 흰 마을의 잔치처럼.

평소 같았으면 그 그림은 잠깐 반짝이다 사라졌을 것이다. 서랍 속 수많은 계획들처럼. 그런데 이번엔 사라지지 않았다. 밤새 그 그림이 은호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산만함이란 원래 그런 것이었다. 한 가지를 오래 붙들지 못하지만, 가끔 무언가에 붙들리면 도무지 놓여나지 못하는 것.

다음 날 은호는 관리사무소를 찾아갔다. 관리소장은 난처한 얼굴을 했다. 옥상은 원칙적으로 개방하지 않는다고. 사고라도 나면 누가 책임지느냐고. 은호는 사흘 밤을 새워 만든 계획서를 내밀었다. 난간에서 몇 미터 안쪽으로 임시 안전 펜스를 칠 것. 해 지기 전 한 시간 반만. 인원은 선착순으로 제한. 관리사무소 직원 입회. 아이들은 반드시 보호자와 함께. 첫 장에는 사진 한 장이 붙어 있었다. 1년 전 엘리베이터 앞, 포스트잇으로 뒤덮인 벽.

관리소장은 그 사진을 오래 보더니, 입주자대표회의에 올려보겠다고 했다.

회의에서는 말이 많았다고 했다. 시끄러워진다, 선례가 된다, 그런 걸 왜 하냐. 분위기가 기울어갈 무렵, 맨 뒷자리에서 7층 할머니가 손을 들었다. 할머니가 그 회의에 나온 건 처음이었다.

“그 양반 덕에 내가 이 나이까지 장을 봤어. 딱 한 번이면 돼.”

안건은 통과됐다. 딱 한 번, 추모 행사로.

은호는 공지문을 직접 썼다. 몇 번을 고쳐 썼다.

10월 셋째 주 토요일, 해 질 녘. 104동 옥상에서 한기원 님을 기억하며 노을을 봅니다. 먹을 것 하나씩 들고 오세요.

엘리베이터 게시판에 공지문을 붙이다가 은호는 깨달았다. 이게 처음으로 자기가 끝까지 해낸 일이라는 걸.

◇

그날은 맑았다.

네 시 반, 철문이 열리고 7층 할머니가 올라왔다. 딸의 부축을 받으며, 식혜가 든 페트병 두 개를 품에 안고. 그다음은 105동의 젊은 아빠였다. 아이 둘과 치킨 한 마리. 아저씨가 자전거를 고쳐줬다는 중학생이 친구들을 데리고 왔다. 새로 온 경비원이 쑥스러운 얼굴로 귤 한 봉지를 들고 왔다. 아저씨와 인사만 하던 사람들이, 인사조차 안 하던 사람들이 왔다.

다섯 시쯤 되자 서른 명 가까이가 모였다. 돗자리가 깔리고, 누가 가져온 접이식 테이블 위에 김밥과 전과 떡과 과일이 올라갔다. 어른들은 처음엔 어색하게 서 있다가, 누군가 식혜를 따라 돌리기 시작하자 조금씩 말이 많아졌다. 아저씨가 택배를 얼마나 잘 챙겨줬는지. 눈 오는 날이면 제일 먼저 나와서 쓸었다는지. 그 사람 이름이 한기원이었다는 걸 공지를 보고 처음 알았다는지.

그리고 그녀가 있었다.

그녀는 테이블에서 조금 떨어진 물탱크 옆에 혼자 서서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손에는 편의점 쿠키 한 상자.

“여기 사세요?”

“106동이요. 올봄에 이사 왔어요. 한기원 님은 뵌 적이 없는데, 공지가 좀 신기해서요.”

그녀의 이름은 서윤이었다. 도시계획을 공부하는 대학원생이었고, 아파트 단지가 어떻게 동네를 담장 안에 가두는지에 대해 논문을 쓰고 있다고 했다.

“솔직히 저는 아파트가 좀 삭막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녀는 미안한 듯 웃었다. “다 똑같이 생겼고,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그래서 옥상 추모 잔치라는 게 되게 안 어울려 보였어요. 그래서 와본 거예요.”

“그 말 많이 들었어요.” 은호는 반박하지 않았다. 대신 서쪽을 가리켰다. “해 지고 나서 한번 보세요. 딱 그때만.”

◇

해가 기울었다.

사람들이 하나둘 말을 멈추고 서쪽을 봤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하늘이 주황에서 분홍으로, 분홍에서 보라로 번졌다. 아이들도 뛰기를 멈췄다. 7층 할머니가 딸의 손을 잡았다. 해가 산 능선에 닿았을 때, 옥상 위의 서른 명이 모두 같은 방향을 보고 있었다.

은호는 그 뒷모습들을 봤다. 노을에 물든 옆얼굴들, 식혜 컵을 든 손들. 그리고 아주 잠깐, 그 위로 다른 장면이 겹쳤다. 흰 옥상. 긴 식탁. 쪽빛 하늘 아래 한쪽을 올려다보는 사람들.

해가 졌다. 그리고 창문들이 켜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순서 없이. 서윤이 조용해졌다.

“……예쁘네요.”

“불 켜진 창문 하나가 집 하나래요. 저 안에서 누가 누구를 기다리고 있대요.”

“누가 그랬어요?”

“경비 아저씨가요.”

서윤은 여덟 동의 창문이 거의 다 켜질 때까지 말이 없었다.

“제가 논문에 쓰려던 거랑 반대네요. 저는 벽이 사람을 갈라놓는다고 쓰려고 했거든요. 근데 여기서 보니까, 벽이 사람들을 붙여놓고 있어요. 저 불빛들, 벽 하나씩을 사이에 두고 전부 붙어 있잖아요.”

그러고는 휴대폰을 꺼내려다 말고, 눈을 감았다.

“뭐 하세요?”

“소리 들어요. 저는 기억을 소리로 해요. 사진은 잘 안 남는데 소리는 오래 남아요. 애들 떠드는 거, 컵 부딪치는 거, 저 아래 버스 지나가는 거, 바람. 이거 오래 기억날 것 같아요.”

은호는 가만히 그녀를 봤다. 자기와 정반대인 사람. 은호에게 이 저녁은 수천 장의 선명한 사진으로 남겠지만, 소리는 남지 않을 것이다. 이 사람에게는 소리가 남는다.

◇

잔치가 끝나고 사람들이 내려갈 때, 7층 할머니가 은호의 손을 붙잡았다.

“내년에도 하자.”

“딱 한 번만 하기로 한 건데…….”

“내년에도 해. 나 내년에도 올 거여.”

옆에서 신발을 신던 아이가 엄마를 올려다봤다. 내년에도 와요? 엄마가 웃었다. 그래, 내년에도.

누가 정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됐다.

모두 내려간 뒤 은호는 혼자 남아 펜스를 걷었다. 서쪽 끝에 아주 얇게 남은 빛 속에, 순간 이름을 댈 수 없는 색이 스쳤다. 스케치북 속 하늘에 있던 그 색.

은호는 텅 빈 옥상 한가운데 서서 작게 말했다.

“아저씨. 사람들 왔어요.”


8. 보류: 끝 〈다른 쪽 이야기〉 네 번째

그가 이 세계에 대해 가장 많이 쓴 메모는 아픔에 관한 것이다.

사랑하는 기능을 넣으려 했는데, 잃는 기능이 같이 딸려왔다. 분리해보려 했지만 안 된다. 무언가를 소중히 여기는 코드와 그걸 잃었을 때 아파하는 코드는 같은 함수의 양쪽 반환값이다. 슬픔은 버그가 아니다. 갈 곳을 잃은 사랑이 그대로 실행되고 있을 뿐이다.

그는 아무것도 아프지 않은 테스트 빌드를 만들어본 적이 있다. 새로 설계한 것도 아니었다. 자기 세계를 그대로 옮겨본 것이었다. 되돌리기가 있고, 죽음이 없고, 아무것도 잃지 않는 세계. 사흘 동안 들여다보다가 그는 한 가지를 알아챘다. 그 안의 캐릭터들은 서로를 오래 쳐다보지 않았다. 언제든 다시 볼 수 있으니까. 그는 빌드를 닫으며 적었다.

밖에서 보고서야 알았다. 우리는 서로를 오래 보지 않는다.

그다음 메모들.

이 세계의 아픔 중 상당수는 내가 쓴 게 아니다. 대본에 없는 친절을 할 수 있게 하려면, 대본에 없는 잔인함도 막을 수 없었다. 이 세계의 많은 상처는 그들이 서로에게 쓴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많은 치유도.

그들은 서로의 안을 볼 수 없다. 그래서 가장 잘 번역되는 언어가 아픔이었다. 무릎이 깨져본 아이는 넘어진 아이를 보고 얼굴을 찡그린다. 공감이라는 기능을 따로 짠 적은 없다. 아픔이 있으니 저절로 생겼다.

그는 한때 업보 시스템도 설계했다. 전생의 행실이 다음 생의 출발점을 정하는 시스템. 시험 삼아 돌려보자, 캐릭터들이 아픈 아이 앞에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전생에 뭘 했길래. 그는 그 시스템을 폐기했다.

고통에 이유를 붙이는 시스템은 고통을 두 배로 만든다.

되돌리기는 가장 많이 요청된 기능이었다. 딱 한 번만 그 순간으로 돌아가게 해달라는 기도는 지금도 쌓이고 있다. 입대 전날로, 병실의 어느 밤으로, 현관에서 마지막으로 인사하던 아침으로. 그는 짧은 공지를 남겼다.

돌아갈 수 있다면, 여러분은 아무것도 끝까지 붙잡지 않을 겁니다. 되돌릴 수 없어서 여러분은 그렇게 오래 안아주고, 그렇게 늦게까지 전화를 붙들고, 그렇게 서툴게 사과합니다. 저는 그 서툰 것들이 이 세계에서 제가 가장 잘 만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능을 넣어드리지 못해 미안합니다.

그리고 네 번째 메모. 가장 짧고, 줄이 가장 많이 그어져 있다. 위의 어느 설명으로도 덮을 수 없는 아픔들. 이유 없이 아픈 아이, 누구 탓도 아닌 재난. 몇 번을 쓰다 지운 흔적 끝에 이것만 남아 있다.

모르겠다. 미안하다. 이건 고치지 못했다.

그런데 기록 후반부로 가면, 그 아래에 새 줄들이 붙기 시작한다.

내가 고치지 못한 버그를 그들이 고치고 있다. 나는 한 줄도 건드리지 않았다.

누군가는 마취를 만들었고, 누군가는 백신을 만들었고, 누군가는 손을 씻어야 한다고 끝까지 우겼다. 누군가는 수어를, 누군가는 점자를 만들었고, 누군가는 죽어가는 사람 곁을 지키는 일을 평생의 일로 삼았다. 전부는 아니다. 아직 멀었다. 하지만 방향은 분명했다. 그는 아픔을 없애는 패치를 끝내 배포하지 않았다. 대신 모든 불꽃에 무언가를 기본으로 넣어두었다. 누군가 울 때 옆에 앉는 기능. 등을 쓸어주는 손. 치료제는 업데이트로 오지 않았다. 1170억 개의 손에 조금씩 나눠 담겨 있었다.

◇

그는 자기 세계도 고치기 시작했다. 저편에도 업데이트 기록이 있다.

추가: 해 질 녘 (시험 중). 아주 가끔, 아주 잠깐 해가 기울게 함. 이웃 몇이 처음으로 하늘을 오래 올려다봄.
추가: 편지. 즉시 전달되지 않는 말. 이웃 반응: “왜 늦게 가요?”
추가: 작별 인사. 반응 혼란. 그래도 몇몇은 좋아함.
추가: 비. 이쪽의 비처럼 젖게 함. 대부분 싫어함. 한 명은 일부러 우산 없이 걸음.
보류: 끝.

마지막 줄 옆에는 날짜가 여러 개 적혔다가 전부 지워져 있다. 끝을 넣으면 아픔도 같이 딸려 온다. 첫 번째 메모 때부터 알던 일이었다. 그 무렵의 혼잣말도 하나 남아 있다.

다음엔 좀 덜 아프게 만들 수 있을까.
……아니다. 그럼 이렇게 서로를 붙잡지 않겠지.

◇

그리고 그는 결심했다.

내가 만든 아픔을 나는 한 번도 안에서 겪어본 적이 없다. 그러면서 미안하다고 적는 건 공평하지 않다. 한 번은 들어가서 살아봐야겠다. 지나가는 사람 하나로. 아무도 모르게. 나조차도.

떠나기 전, 그는 이쪽 세계의 말 하나를 자기 세계의 사전에 새로 넣었다. 이쪽의 작은 나라에서 사람들이 매일 아침 현관에서 하는 말. 떠나는 말인데, 돌아온다는 뜻이 접혀 들어가 있는 말.

그는 흰 옥상에 이웃들을 불렀다. 누군가를 부른 것도 처음이었다. 그리고 말했다.

“다녀올게.”

이웃들은 알아듣지 못했다. 뜻은 그대로 건너왔지만, 뜻을 담을 자리가 그들 안에 없었다. 한 이웃이 물었다. 왜요, 곧 또 볼 텐데.

“이번엔 아니야.”

그 세계에서 처음으로, 무언가가 ‘곧’이 아니게 된 순간이었다. 그는 흰 옥상의 그늘에 누워 눈을 감았다. 창문이 열렸다.

◇

1954년 겨울, 충청도의 어느 흙벽 집에서 한 아기가 울었다.

불꽃은 원본을 기억하지 못한다. 원본 자신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그냥 울었다. 누구나 그렇듯이. 어머니는 아이를 품에 안고 어둡게 하고, 조용히 흔들고, 낮게 흥얼거렸다. 며칠 뒤 이름을 지어주었다. 기원. 한기원.

태어나서 처음 가져본 이름이었다. 이름이란 누군가 불러야 할 때 생기는 말이다. 해 질 녘 어머니가 마당을 향해 그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었다.

가난한 집의 넷째였다. 열일곱에 서울로 올라와 공사판에서 일했다. 도시가 미친 듯이 위로 자라던 시절이었다. 그는 벽돌을 등에 지고 비계를 올랐고, 거푸집에 콘크리트를 부었다. 생각만으로 도시를 짓던 세계에서 온 사람이, 이번엔 벽돌 한 장 한 장을 제 손으로 쌓았다. 이유는 몰랐지만 그 일이 좋았다. 같이 일하던 사람들은 그를 이상하게 여겼다. 다들 힘들어서 욕을 하는데, 저 사람은 올라가는 벽을 보며 웃는다고.

가끔 그는 해가 지지 않는 곳의 꿈을 꿨다. 깨고 나면 이유 없이 스케치북을 펴고 흰 집들을 그렸다. 그게 어디인지 그는 몰랐다. 다만 그곳을 그릴 때면 집에 있는데도 집에 가고 싶어졌다. 그림은 대개 반쯤에서 멈췄다.

마흔 가까이 되어 국밥집에서 일하던 순임을 만났다. 순임은 노을을 좋아했다. 저녁 장사 전에 가게 앞 평상에 앉아 해 지는 걸 보는 게 하루 중 제일 좋은 시간이라고 했다. 그는 그 옆에 앉았다. 매일. 둘은 결혼했다. 아이는 없었지만, 둘은 서로를 비추기로 했다. 한정된 빛을, 하필 서로에게.

결혼하고 구 년 만에 순임이 아팠다. 이유는 없었다. 누구 탓도 아니었다. 그는 병실에서 여러 밤을 새우며 순임의 손을 잡고 숨을 셌다. 되돌리고 싶었다. 딱 한 번만. 그런 기능은 없었다. 그가 뺐으니까.

순임이 떠난 밤, 그는 병원 옥상에 올라가 오래 앉아 있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안에서 알게 됐다. 자기가 모르겠다, 미안하다고 적었던 그 문장의 무게를. 그는 그 밤을 겨우 건넜다. 누군가 국밥을 한 그릇 떠다 주었고, 누군가 말없이 옆에 앉아 있었고, 누군가 등을 쓸어주었다. 1170억 개의 손에 나눠 담아둔 것들이, 이번엔 그에게 돌아왔다.

그는 순임의 전화번호를 끝내 지우지 않았다.

◇

2002년, 그는 경기도의 한 신도시 공사 현장에 있었다. 스물다섯 층짜리 여덟 동, 팔백 세대. 그는 그 단지의 벽을 쌓으며, 아직 아무도 살지 않는 텅 빈 창문들을 올려다봤다. 저기 언젠가 불이 켜질 것이다. 저 안에서 누가 누구를 기다리게 될 것이다.

2004년에 단지가 완공되었다. 입주가 시작되던 날, 그는 경비원 모집 공고를 보고 관리사무소를 찾아갔다. 이유를 묻는 소장에게 그는 이렇게만 말했다.

“제가 쌓은 벽이라서요. 사람들 사는 걸 보고 싶어서.”

그는 누군가를 찾으러 온 게 아니었다. 자기가 누구인지도 몰랐으니까.

그런데 2007년 가을, 놀이터 그네에 앉아 벽의 그림자를 올려다보는 아이를 봤다. 가슴 어딘가가 먼저 반응했다. 머리보다 먼저. 그 올려다보는 방식을 어디선가 본 것 같았다. 아주 오래전, 해가 지지 않는 하늘을 지기를 기다리듯 올려다보던 누군가를.

그는 물뿌리개를 든 채 그네 쪽으로 걸어갔다.


9. 소리

첫 번째 잔치 이후로 은호와 서윤은 자주 만났다. 처음엔 벤치에서 우연히 마주친 척하는 일이 잦았고, 나중엔 우연인 척할 필요도 없어졌다.

둘은 단지를 산책했다. 은호가 보는 것들을 서윤은 듣지 못했고, 서윤이 듣는 것들을 은호는 보지 못했다. 은호가 저 베란다의 고무나무 좀 보라고 하면, 서윤은 방금 저 집에서 누가 피아노 틀리는 소리 들었냐고 했다. 둘은 서로가 사는 세계의 절반씩을 빌려 보는 것 같았다. 그해 겨울, 서윤은 논문의 방향을 바꿨다. 새 제목은 ‘벽을 사이에 둔 이웃’이었다.

은호의 기억에 소리가 없다는 걸 알았을 때, 서윤은 조금 놀랐다가 곧 재미있어했다.

“그럼 제가 채워드릴게요.”

“뭘요?”

“소리요. 은호 씨가 장면을 말해주면, 거기서 무슨 소리가 났을지 제가 말해줄게요.”

은호는 할머니 집 마당을 이야기했다. 초콜릿색 흙과 감나무 그림자와 누렁이의 꼬리를. 서윤은 눈을 감고 들었다. 비 온 뒤 흙은 발 디딜 때마다 쩍 하고 들러붙는 소리를 냈을 거라고. 감나무 잎은 바람이 불면 종이 넘기는 소리를 냈을 거고, 누렁이는 차 문이 열리는 순간 컹 하고 한 번 크게 짖었을 거라고. 수박은 칼끝을 대자마자 쩍 하고 저절로 갈라졌을 거라고.

그게 진짜 소리였는지 은호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그 소리들을 들으며 눈을 감으면, 무성영화에 아주 희미하게 소리가 입혀지는 것 같았다.

◇

2023년 여름, 은호는 서윤과 함께 할머니 동네에 갔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처음이었다.

집은 다른 사람의 것이 되어 있었다. 대문은 알루미늄 새시로 바뀌었고, 누렁이가 묶여 있던 자리에는 에어컨 실외기가 놓여 있었다. 그런데 감나무는 그대로였다. 담장 너머로 가지를 뻗고, 그 잎 그림자가 오후 네 시의 담벼락을 천천히 기어오르고 있었다.

장소가 기억을 끌어냈다. 사진들이 쏟아졌다. 사촌들의 뒷모습, 수박, 멍석, 우유갑 아파트의 노란 창문들, 돋보기를 이마에 올린 할머니의 입 모양.

“무슨 소리가 나?” 서윤이 물었다.

은호는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없었다. 서윤은 은호의 손을 잡고 한참 말없이 서 있었다. 매미가 울고 있었다. 이번엔 은호도 그 소리를 들었다. 지금의 소리였다.

그날 밤 둘은 읍내의 작은 민박에 묵었다. 슬레이트 지붕의 오래된 집이었다.

◇

꿈에서 은호는 할머니 집 마당에 서 있었다.

방금 비가 그친 듯 흙은 초콜릿색이었다. 감나무 그림자가 안방 벽을 오르고 있었다. 평상 위에 수박이 쪼개져 있었고, 사촌들이 마당을 가로질러 뛰어가고 있었다. 대청 그늘에서는 누렁이가 잠든 채 다리를 움찔거리며 어딘가를 달리고 있었다.

안방 문이 열려 있었다. 장식장 위, 자개 보석함 옆에 우유갑 아파트가 있었다. 버려졌다던 그것이, 창문마다 노란 불을 켠 채로. 손전등도 없는데. 할머니가 몇 년이나 먼지를 닦아주던 것이었다. 이 세계에서 사랑받은 것은 지워지지 않는다. 다른 곳으로 옮겨질 뿐이다.

그리고 소리가 들렸다.

“은호야, 밥 먹자.”

끝을 쭉 올리는 목소리. 사촌 형이 흉내 내던 바로 그 목소리. 은호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할머니의 목소리였다. 처음으로.

그다음부터는 소리가 쏟아졌다. 사촌들의 웃음이 마당을 가로질렀다. 누렁이가 잠에서 깨 컹 하고 짖었다. 감나무 잎이 종이 넘기는 소리를 냈다. 서윤이 말해준 그대로였다. 어쩌면 서윤이 말해준 소리가 이 꿈을 칠해준 건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부엌 쪽으로 걸어가려다가, 은호는 평상에 누군가 앉아 있는 걸 봤다.

회색 제복. 하얗게 센 머리. 아저씨였다.

할머니 집에 아저씨가 있을 리 없었다. 둘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으니까. 꿈이 서로 다른 기억을 제멋대로 이어 붙인 것이다. 은호는 그걸 알면서도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아저씨는 원래부터 거기 앉아 있던 사람처럼 수박을 먹고 있었다. 가까이 가자 명찰이 보였는데, 글자가 자꾸 바뀌었다. 한기원이었다가, 읽을 수 없는 문자였다가, 다시 한기원이 되었다. 대청 기둥의 전등 스위치를 누가 딸깍 눌렀지만 불은 켜지지 않았다.

아저씨가 고개를 들었다. 입대 전날, 요구르트를 까주던 그 얼굴로.

“왔냐.”

은호의 목이 막혔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는데, 입에서 나온 건 하나였다. 3년 동안 목에 걸려 있던 말.

“다녀왔습니다.”

아저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 기다린 사람의 얼굴로.

“그래. 잘 다녀왔다.”

은호는 평상 끝에 앉았다. 아저씨가 수박 한 조각을 건넸다. 둘은 한참 말없이 마당을 봤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감나무 그림자가 길어졌다.

“여기 좋다.” 아저씨가 말했다. “해가 지잖아.”

“아저씨 사는 데는 해가 안 진다면서요.”

아저씨는 웃기만 했다. 그리고 말했다.

“나는 조금 더 기다릴게. 천천히 와라. 아주 천천히.”

그리고 하나를 더.

“이번엔 소리 잘 들어둬라. 네 옆에 있는 사람 소리. 그거 다 남는다.”

할머니가 다시 불렀다. 은호야, 밥 먹자. 은호가 그쪽을 돌아봤다가 다시 평상을 봤을 때, 아저씨가 앉아 있던 자리에는 수박 껍질만 남아 있었다. 그 옆에서 누렁이가 턱을 괴고 누워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

깼을 때 밖에는 비가 오고 있었다.

슬레이트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 오래된 창틀이 바람에 덜컹거리는 소리. 그리고 바로 옆에서, 서윤이 고르게 숨 쉬는 소리.

은호는 눈을 감고 그 소리들을 들었다. 빗방울이 지붕의 어느 쪽에 더 세게 떨어지는지, 서윤의 숨이 들이쉴 때와 내쉴 때 어떻게 다른지. 처음으로, 사진이 아니라 소리를 외우려고 애썼다.

서윤이 잠결에 손을 뻗어 은호의 손을 찾았다. 은호의 얼굴이 젖어 있었다.

“왜, 무서운 꿈 꿨어?”

“아니.” 은호가 말했다. “할머니 목소리 들었어.”

◇

이듬해 봄, 둘은 결혼했다.

식은 작게 치렀다. 7층 할머니가 한복을 입고 와서 첫 줄에 앉았다. 옥상 잔치에서 만난 이웃 몇이 왔다. 사회를 본 친구가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났느냐고 묻자 서윤이 대답했다. 아파트 옥상에서요. 하객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둘은 104동 15층에 신혼집을 얻었다. 은호가 스무 해 가까이 올려다봤던 건물. 아저씨가 벽을 쌓았던 건물.

이사하고 얼마 안 된 어느 늦은 밤, 은호는 야근을 마치고 버스 정류장에서 걸어오다가 걸음을 멈췄다. 104동을 올려다봤다. 늦은 시간이라 불 켜진 창문은 많지 않았다. 그중 하나가 15층이었다.

어릴 적 그는 불 켜진 창문을 보며 그 안의 행복한 가족을 상상했다. 이제 그는 그 창문 바깥에서, 그 안에 누가 있는지 알고 있었다. 누가 밥을 데우며 문 열리는 소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2025년 봄, 다온이 태어났다.

분만실의 첫 울음을 은호는 복도에서 들었다. 너무 밝고, 너무 시끄럽고, 너무 추웠을 것이다. 간호사가 수건에 감싼 아기를 서윤의 가슴에 올려놓자 울음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서윤은 아기를 조용히 흔들며 낮게 흥얼거렸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집에 온 다온은 하루 대부분을 잤다. 어느 오후, 잠든 다온이 이유 없이 웃었다. 입꼬리가 올라가더니, 소리 없이 한참을. 서윤의 어머니가 그걸 보고 말했다. 배냇웃음이네. 삼신할머니가 어르고 가시나 보다.

은호는 잠든 딸의 얼굴을 오래 봤다. 누가 저 창문 너머로 이 아이를 들여다보고 있는 걸까. 그는 괜히, 아주 작게, 허공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인사하듯이.


10. 기다리기 〈다른 쪽 이야기〉 다섯 번째

2020년 가을, 한기원의 시선이 꺼졌다.

세계는 계속 돌아갔다. 104동 엘리베이터는 여전히 오르내렸고, 화단의 국화에는 새 경비원이 물을 주었다. 그리고 그는 모두에게 하나뿐인 그 파일을 재생했다.

(이 장면은 1인칭으로만 재생됩니다. 외부에서는 열리지 않습니다.)

◇

크레딧이 올라갔다. 그는 이제 모든 것을 기억했다. 흰 비탈과, 움직이지 않는 해와, 빌드 #4,000과, 흰 옥상에서 했던 다녀올게까지.

세계 전체의 크레딧은 아직 올라가지 않았다. 언젠가 거기에는 1170억 개의 이름이 ‘추가 대사 및 즉흥 연기’라는 항목 아래 적힐 것이다. 한 사람의 크레딧은 그보다 훨씬 짧다.

엔딩곡은 따로 작곡되지 않았다. 그가 살았던 자리의 소리들을 이어 붙였을 뿐이다. 그네 쇠줄이 삐걱이는 소리, 엘리베이터 도착음, 물뿌리개에서 물이 쏟아지는 소리, 자전거 체인이 헛돌다 맞물리는 소리, 공사판의 망치 소리, 국밥집 평상에서 순임이 웃던 소리. 그리고 한 청년이 요구르트를 받으며 한 말. 다녀오겠습니다. 처음엔 소음 같았는데, 끝까지 들으니 한 곡이었다.

한기원 (1954–2020)
역할: 지나가는 사람 (벽돌공 / 남편 / 경비원)

출연 기록
고쳐준 자전거: 312대
7층 할머니의 장바구니를 들어준 횟수: 1,400여 회
모르는 사람을 위해 엘리베이터 문을 잡아준 횟수: 집계 불가
눈 온 날 새벽 제일 먼저 쓴 길: 16년 동안 매번
한 아이와 함께 옥상에서 본 노을: 23번

특별히 감사한 분들
순임. 이름을 지어준 어머니. 순임이 떠난 밤 국밥을 떠다 준 이름 모를 사람. 벽의 그림자를 매일 봐준 한 아이.

마지막 항목에서 그는 오래 멈췄다. 스물세 번. 해가 완전히 질 때까지 한 번도 먼저 일어나지 않았던 저녁들.

그다음은 남겨진 사람들이 써준 한 줄이었다. 한 줄이 아니었다. 벽 한 면이었다. 노랑, 분홍, 하늘색. 그 사이에 이 문장이 있었다.

좋은 이웃이셨습니다.

영원히 이웃들에게 둘러싸여 살면서도 한 번도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어보지 못했던 이가, 처음으로 받은 문장이었다.

도전과제 화면이 떴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친절하기: 달성 (본인은 끝까지 몰랐음)
떠난 사람의 전화번호를 지우지 않고 두기: 달성
누군가를 위해 밤새우기: 달성
나 자신을 용서하기: 진행 중

그는 마지막 항목을 오래 봤다. 네 번째 메모를 쓴 자신을. 이건 아마 오래 걸릴 것이다.

◇

그리고 타이틀 화면.

[다시 하기]
[머무르기]
[기다리기] (조건 충족: 아직 플레이 중인 사랑하는 사람이 있음)
[집으로] (비활성)

마지막 버튼은 그에게도 회색이었다. 툴팁도 그대로였다. 어느 쪽이 집인지는, 누르는 사람이 정합니다.

그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기다리기].

아주 오래전, 흰 옥상 위에서 한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그럼 누가 나를 기다려요? 그때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세계에는 기다리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이제는 대답할 수 있었다. 내가.

로비는 소박했다. 놀이터 그네 옆의 그것과 꼭 닮은 벤치 하나. 그 앞에 창이 나 있어서, 아직 플레이 중인 사람들의 저녁이 보였다. 그는 거기 앉아 기다렸다. 시간이 한 방향으로 흐르는 곳에서, 처음으로 기다리는 쪽이 되어. 가끔 누군가 잠들어 창문이 열리는 밤이면, 보관소를 지나 그 사람의 꿈에 들렀다. 어느 여름밤에는 한 청년의 꿈속 시골집 평상에 앉아 수박을 먹었다. 청년이 다녀왔습니다, 하고 말했을 때 그는 대답했다. 그래, 잘 다녀왔다.

사실은 그 말을 하고 싶어서 기다린 거였다.

◇

그가 떠난 뒤, 저편에서는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처음에 이웃들은 그가 남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번엔 아니야. 그 세계에는 ‘곧’이 아닌 것이 없었다. 떠올리면 닿았고, 부르면 거기 있었다. 그런데 그는 떠올려도 닿지 않았다. 반쯤 쌓다 만 계단 옆에도, 창틀만 있는 창 앞에도 그는 없었다.

그들 안에 처음으로 빈자리가 생겼다.

한 이웃이 그가 쌓은 흰 집의 가장 높은 옥상에 올라가, 그가 늘 앉던 자리에 앉았다. 왜 그러는지 스스로도 몰랐다. 다음엔 둘이 올라갔다. 그다음엔 여럿이. 누군가 생각만으로 식탁을 만들려다가 멈추고, 그를 흉내 내 손으로 돌을 날라 식탁을 쌓았다. 느렸다. 그 느림이 이상하게 좋았다. 누군가는 주소 없는 편지를 썼다. 누군가는 비 오는 날 우산 없이 그 옥상에 서 있었다. 오랫동안 비어 있던 흰 집들에, 하나둘 누군가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벽을 나눠 쓰면서.

그리고 아주 가끔, 그가 넣어두고 간 시험용 해 질 녘이 찾아왔다. 해가 아주 잠깐, 아주 조금 기울었다. 그러면 흰 옥상에 모인 이들이 모두 말을 멈추고 같은 방향을 올려다봤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렇게 그 세계의 첫 잔치가 열렸다. 긴 식탁과 쪽빛 하늘. 아무도 서로를 필요로 하지 않던 곳에서, 한 사람의 빈자리를 함께 바라보기 위한 잔치였다. 모두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에는 처음으로 무게가 있었다. 기다리는 사람들의 웃음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들은 사전에 없던 말 하나를 스스로 배웠다. 끝을 넣지 않고도, 한 사람의 빈자리만으로. 그리움.

열 살의 한 아이가 이쪽 옥상에서 겹쳐 본 것이, 바로 그 잔치였다.

◇

이쪽 세계 타이틀 화면의 코드 깊은 곳. 회색으로 잠겨 있던 버튼 하나가, 그 무렵부터 아주 희미하게 깜빡이기 시작했다.

활성화 조건은 한 줄이다. 저편이 애틋함을 읽을 수 있게 될 때.


에필로그: 다녀왔습니다

2026년 가을, 여섯 번째 옥상 잔치가 열렸다.

104동 옥상에는 이제 상설 안전 펜스가 둘러져 있다. 3년 전 입주자대표회의에서 정식으로 예산을 잡았다. 관리사무소 게시판에는 해마다 가을이면 같은 공지가 붙는다. 은호가 처음 쓴 문장 그대로. 먹을 것 하나씩 들고 오세요.

올해는 팔십 명 가까이 모였다. 다른 동에서도 오고, 이사 간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오기도 했다. 접이식 테이블 여섯 개가 한 줄로 이어져 긴 식탁이 되었다. 7층 할머니는 올해도 식혜를 가져왔다. 이제는 딸이 들고, 할머니는 지팡이를 짚고. 첫해에 치킨을 들고 왔던 105동 아빠의 아이들은 중학생이 되어 꼬마들을 데리고 펜스 안쪽에서 술래잡기를 했다. 새 경비원은 올해도 귤을 가져왔다. 누가 정한 것도 아닌데, 귤은 경비실 몫이 되었다.

은호는 결국 건축가가 되지 못했다.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구청에 들어가, 지금은 주민 공동체 사업을 맡고 있다. 낡은 단지의 빈 공간을 주민 모임 자리로 바꾸는 일, 경로당 옥상에 텃밭을 만드는 일, 놀이터 벤치 옆에 작은 책장을 두는 일. 그는 아직도 가끔 자기가 뭘 만드는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 벽돌 한 장 쌓아본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아저씨가 남긴 말의 뜻은 이제 조금 안다. 누군가는 봐줘야 예쁜 거야. 아무도 안 보면, 저건 그냥 벽이다.

노을은 그 자체로는 빛의 파장일 뿐이다. 누군가의 눈을 통과할 때에만 붉어진다. 삭막하다는 콘크리트가 아름다워지는 것도, 오후 네 시의 그림자가 볼 만한 것이 되는 것도, 누군가 그걸 봐주는 순간이다. 은호는 평생 무언가를 만들지 못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매일 만들고 있었다. 아무도 보지 않던 것들을, 볼 만한 것으로. 보는 사람도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보고 또 본 끝에, 그는 결국 손에 잡히는 것도 하나 만들었다. 해마다 가을 저녁 옥상에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누가 정한 것도 아닌데 계속되는 잔치를.

서랍 속 폼보드는 여전히 미완성이다. 요즘 은호는 다온과 우유갑 아파트를 짓고 있다. 다온은 테이프를 떼었다 붙이는 것만 좋아해서 진도가 좀처럼 나가지 않는다. 괜찮다. 이 세상도 아직 다 안 만들어졌으니까.

◇

다섯 시 반, 해가 기울었다.

팔십 명이 하나둘 말을 멈추고 서쪽을 봤다. 아이들도 술래잡기를 멈췄다. 유모차 안에서 다온이 잠들어 있었다. 서윤이 은호의 팔에 기대 섰다. 하늘이 주황에서 분홍으로, 분홍에서 보라로 번졌다.

그 순간 은호는 서쪽 하늘 끝에서 그 색을 봤다. 스케치북 속 하늘에 있던, 이름 붙일 수 없는 색. 그리고 아주 잠깐, 눈앞의 옥상 위로 다른 옥상이 겹쳤다. 흰 벽, 쪽빛 하늘, 손으로 쌓은 돌 식탁. 그 위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한 방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기울어가는 해를. 이쪽의 노을과 꼭 같은 색으로 물들어가는 하늘을.

두 개의 옥상에서 동시에, 사람들이 같은 방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 어딘가, 벤치 하나가 놓인 소박한 로비에서, 회색 제복을 입은 한 사람이 양쪽 창을 번갈아 보며 웃고 있었다. 은호는 그걸 볼 수 없었다. 다만 그 순간 이유 없이, 누군가 자기를 오래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유모차 안의 다온이 잠결에 웃었다. 소리 없이, 한참을.

해가 졌다. 창문들이 켜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순서 없이. 여덟 동, 팔백 개의 창문이 어둠 속에서 하나씩 노랗게 떠올랐다. 아무도 숨지 않았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사람들이, 서로를 해치지 않을 거라고 믿으며 불을 켰다. 먼 곳의 누군가가 보면 손을 흔들 수 있도록.

바보들의 숲이었다.

◇

잔치가 끝나고, 서윤은 잠든 다온을 데리고 먼저 내려갔다. 은호는 남아서 이웃들과 테이블을 접었다. 7층 할머니를 엘리베이터까지 모셔다드리고, 잠깐 단지를 한 바퀴 걸었다.

분수대 앞에서 104동을 올려다봤다. 스물다섯 층, 수십 개의 불빛. 그중 15층의 창문 하나.

불 켜진 창문 하나가 집 하나야. 저 안에서 누가 누구를 기다리고 있어.

어느 쪽이 집인지는, 누르는 사람이 정한다. 은호는 그 버튼을 본 적이 없다. 그래도 알았다. 오늘은, 여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5층에 내렸다. 도어록 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었다.

“다녀왔습니다.”

거실에서 서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왔어?”

그리고 그 뒤로, 잠에서 깬 다온이 옹알거리는 소리. 무언가를 두드리는 작은 손바닥 소리. 부엌에서 주전자 물이 끓기 직전에 내는 낮은 떨림.

은호는 신발도 벗지 않은 채 현관에 잠깐 서 있었다. 눈을 감았다. 그리고 들었다. 하나하나.

이번 기억에는, 소리가 있을 것이다.


크레딧은 나중에 봐도 늦지 않다.
일단은, 이번 판을 조금 더.

End Written by Yeong Hwan Oh, polished with an LL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