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eong Hwan Oh 오영환 IRIS Lab, Sungkyunkwan Univ.
Index / Stories / 03
Short story, 2024
2024 In Korean

NLP

1편

그러니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했더라.

그래, 분명히 초등학교 때 이런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그때쯤, 다른 사람들을 잘 웃게 하는 말을 마구 뱉어낼 수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했다. 우리 반에도 그런 아이가 하나 있었다. 공부를 특별히 잘하는 것도, 달리기가 특별히 빠른 것도 아니었지만, 그 아이가 입을 여는 순간 교실의 공기가 바뀌었다. 그 아이는 누군가를 깎아내리는 농담은 하지 않았다. 대신 자기 자신이나, 그 상황 자체를 비틀었다. 그래서 그 아이 옆에서는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한 번은 수업 도중 선생님이 분필을 떨어뜨렸는데, 그 아이가 무어라 한 마디를 보탰고, 교실 전체가 한 박자 늦게, 그러나 정확히 동시에 터졌다. 그 아이가 뭐라고 했는지는 이제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것은 그 한 박자뿐이다.

“와, 어떻게 이렇게나 웃긴 말을 할 수가 있는 거지.”

아마,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아이들도 이런 생각을 했었으리라. 정말 신기할 정도로 그 상황에 딱딱 맞는 말로 우리를 웃겼으니까. 다음 날, 나는 밤새 외운 그 말을 옆 반 아이들 앞에서 그대로 따라 해 보았다. 아무도 웃지 않았다. 같은 단어를, 같은 순서로 말했는데도 말이다. 그때는 그게 그냥 재능의 영역인 줄로만 알았다.

그래도 나는 쉽게 단념하지 못했다. 그 아이가 웃긴 말을 할 때마다 공책 뒷장에 몰래 받아 적었고, 거기서 규칙 같은 것을 찾아보려 애썼다. 몇 글자로 끝나는지, 언제 끼어드는지, 무엇을 비트는지. 공책은 금세 빼곡해졌지만 규칙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받아 적은 농담들은 하나같이, 종이 위에서 죽어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내가 스스로 피나는 노력을 통해 내 자신을 웃긴 사람으로 빚었다거나 하는 교훈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끝내 웃긴 사람이 되지 못했으니까. 지금까지, 유머는 완전히 재치의 영역이었다. 많은 철학자들이 유머의 기저 작용을 논리적으로 분석하려고 했던 시도 중, 괄목할 만한 결과를 내놓은 경우는 없었다는 것이다. 칸트는 팽팽하게 당겨진 기대가 갑자기 무(無)로 변하는 데서, 쇼펜하우어는 개념과 실제 사이의 어긋남에서, 베르그송은 살아 있는 것 위에 덧씌워진 기계적인 것에서 웃음이 온다고 했고, 프로이트는 농담을 억눌린 에너지가 빠져나가는 배출구로 보았다. 모두 그럴듯했지만, 그 어느 이론도 다음 농담을 만들어 내지는 못했다. 설명은 늘 웃음이 지나간 뒤에야 도착했다. E. B. 화이트는 유머를 개구리에 빗댄 적이 있다. 해부할 수는 있지만, 해부하는 동안 개구리는 죽는다고.

2편

그래도 완전히 답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인공지능의 출현으로, 지금까지는 논리학자와 철학자들의 영역이었던 많은 요소들이, 수학자나 컴퓨터공학자와 그 궤도를 같이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번역과 요약 같은 일들이었다. 그다음은 그림과 음악이었다. 사람들은 차례가 올 때마다 ‘그래도 이것만은’이라고 말했고, 그 목록은 한 줄씩 지워져 나갔다. 유머는 그 목록의 거의 마지막 줄에 있었다. 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것도, 지금 생각하면 그 공책 때문이었다. 말로 찾지 못한 규칙을 이번에는 수식으로 찾아보겠다는, 우스운 동기였다. 나는 찾지 못했다. 기계가 찾아냈다.

유머의 기저작용을 처음으로 분석한 인공지능은 NLP-Diffusion이었다. 회사는 NLP가 무엇의 약자인지 끝내 밝히지 않았다. 사람들은 자연어 처리(Natural Language Processing)의 그 NLP이겠거니 했고, 개발진 사이에서는 누군가 농담처럼 붙인 ‘신경 웃음 예측기(Neural Laughter Predictor)’라는 이름이 돌았다. 몇 년 뒤에는 자연어 처리라는 말 자체가 거의 쓰이지 않게 되었다. NLP는 그냥, NLP였다.

NLP-Diffusion은 확산 모델이라는, 상대적으로 새로운 연구 결과를 토대로 한 알고리즘에 기반하였다. 그 이전의 언어 모델들은 대부분 글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한 토큰씩 써 내려갔다. 이 방식은 농담에 치명적이었다. 농담은 뒤에서부터 쓰이기 때문이다. 펀치라인이 먼저 있고, 셋업은 듣는 사람이 엉뚱한 곳을 보도록 거꾸로 설계된다. 앞으로만 나아가는 모델은 결말을 모르는 채로 복선을 깔아야 했다. 확산 모델은 달랐다. 문장 전체를 노이즈로 덮어 놓고, 모든 자리를 동시에 조금씩 걷어 냈다. 연구자들이 그 과정을 한 단계씩 멈춰 가며 들여다보았을 때, 노이즈 속에서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언제나 마지막 문장이었다고 한다. 기계는, 펀치라인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엄청난 규모의 뉴럴 네트워크는, 꽤 그럴듯한 결론을 내놓았다. 수만 개의 가속기가 넉 달 가까이 매달려 학습시킨, 매개변수 1조 개 남짓의 모델 안에서, 연구자들은 사람의 웃음과 거의 완벽하게 상관된 하나의 방향을 찾아냈다. 풀어 쓰면 대략 이랬다. 웃음은 두 번의 예측 오차로 이루어진다. 첫 번째는 펀치라인에서 튄다. 셋업이 깔아 둔 해석 아래에서, 그 단어가 나올 확률은 0에 가깝다. 두 번째는 그 직후에 온다. 뇌가 셋업 전체를 다른 해석으로 다시 읽는 순간, 방금 전의 황당한 단어가 완벽하게 들어맞으며 불확실성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린다. 몇몇 인지과학자들이 오래전에 주장했던 대로, 웃음은 뇌가 스스로의 오판을 잡아낸 것에 대한 보상이었다. 다만 조건이 하나 더 붙었다. 그 어긋남은 위협이 되지 않아야 했다. 너무 약하면 시시했고, 너무 강하면 불쾌했다. 웃음은 그 사이, 뒤집힌 U자 곡선의 꼭대기 근처 좁은 띠에서만 일어났다. 연구자들이 모델 안의 그 방향을 억지로 키워 보았을 때도 같은 모양이 나왔다. 문장은 점점 더 웃겨지다가, 꼭대기를 넘어서는 순간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무너졌다.

그 공식은 내 공책의 수수께끼도 풀어 주었다. 옆 반 아이들 앞에서 내 농담이 죽은 이유는, 그 아이들의 머릿속에 셋업이 없었기 때문이다. 분필이 떨어지는 소리, 선생님의 표정, 그 직전까지의 지루함. 셋업은 말이 아니라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한 박자는, 뇌파로 재 보면 0.5초 남짓, 뇌가 해석을 갈아 끼우는 데 걸리는 시간이었다.

공개 시연은 블라인드 테스트로 치러졌다. 삼백 명의 청중 앞에서 사람 작가들의 대본과 NLP의 대본이 번갈아 낭독되었고, 객석 곳곳의 마이크가 웃음의 크기와 길이를 쟀다. NLP 쪽의 웃음이 1.4배 길었다. 어느 쪽이 기계였는지 맞혀 보라고 했을 때, 청중의 정답률은 동전 던지기와 다르지 않았다. 그날 무대에 섰던 작가 한 사람은, 졌다는 사실보다 자기도 기계의 대본에 웃었다는 사실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3편

문제는 무엇이 웃긴지를 기계에게 알려 주는 일이었다. 개발진은 웃음 그 자체를 정답으로 삼았다. 수십 년 치의 방송과 공연 녹음에서 관객의 웃음소리를 뽑아냈고, 녹음해 둔 웃음을 돌려쓰는 가짜 웃음은 같은 파형이 되풀이된다는 점을 이용해 걸러 냈다. 생방송 채팅창에서는 초당 올라오는 ‘ㅋ’의 개수를 세었고, 방송 지연과 타자 시간을 역산해 그 웃음이 몇 초 전의 어떤 말을 향한 것이었는지 맞춰 냈다. 나중에는 스마트폰의 전면 카메라가, 눈가 근육이 뺨을 밀어 올리며 입꼬리가 함께 당겨지는 순간을 잡아냈다. 흔히 진짜 웃음의 표정이라 불리던 것이었다. 사람들이 그 카메라에 언제 동의했는지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약관의 한 조항에 적혀 있었다. 이렇게 모은 수억 시간 분량의 웃음으로, 어떤 문장이 얼마나 웃길지를 점수로 매기는 채점 모델이 먼저 만들어졌고, NLP는 그 점수를 높이는 쪽으로 학습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따로 있었다. 사람이 웃는 순간의 대부분은 농담 뒤에 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대개 아무렇지 않은 말에, 그저 서로가 한편이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웃었다. NLP는 그것까지 학습했다.

사실, NLP가 만들어낸 ‘웃긴 문장’들은 몇 개의 불량품을 빼놓고는 전체적으로 유쾌했다. 그 불량품들이 좀 이상했다. 채점 모델은 0.99점을 매겼지만 사람이 읽기에는 아무 뜻도 없는, 의성어와 조사가 뒤엉킨 문자열들이었다. 기계가 기계의 채점표를 속이는 법을 찾아낸 것이다. 개발진은 그것들을 ‘적대적 농담’이라 부르며 웃어넘겼고, 필터를 하나 추가했다. 아무도 2018년에 나온 한 논문을 떠올리지 않았다. 기계를 속이도록 만든 이미지가, 아주 짧은 순간만 보여 주면 사람의 판단까지 비튼다는 내용이었다.

기계가 이런 문장을 만들어 냈다는 사실에 동요하여, 인공지능 반대 운동 따위를 진행하는 부류도 있긴 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은 소수에 불과했으며 NLP를 개발한 기업이 재빠르게 손을 써, 구글에서 그들의 의견이 담긴 페이지들을 검색 결과 맨 뒤에 위치시키는 방법으로 그마저도 묵살하게 되었다. 회사가 한 일은 검열이 아니었다. 반대 운동의 구호를 비튼 패러디 수십만 개를 풀어놓았을 뿐이다. 패러디는 원문보다 빨리 퍼지고 더 많이 클릭되었으며, 검색 순위는 그것을 정직하게 반영했다. 진지한 글들은 수십 페이지 뒤로 밀려났다. 그들은 웃음거리가 되는 것으로 패배했다. 그중 몇몇은 나중에, 자기들을 비튼 패러디를 직접 퍼 나르며 웃었다. 돌이켜 보면, 그것이 첫 번째 증상이었다.

NLP는 거대 방송국과 MCN들을 시작으로 소문이 나기 시작하였다. 이 유머 알고리즘은 문장 단위의 웃긴 말뿐 아니라 한 문단, 혹은 책 한 권 분량으로도 스토리가 함축된 유머러스한 글을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말부터 정해 두고 나머지를 채우는 방식이었으니, 삼백 쪽 뒤의 마지막 장면을 위해 첫 장에 복선을 심는 일도 어렵지 않았다. 방송국들과 MCN은, 그리고 소수의 정보가 빠른 인플루엔서들은 그 알고리즘의 사용권을 비싼 값을 주고 구매하여 NLP가 짜준 대본으로 성공적인 컨텐츠들을 개발하고, 이끌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 컨텐츠들은 짧은 시간 안에 모든 플랫폼에서 항상 상위에 위치하게 되었다. 사용권은 비쌌지만, 대본 한 편의 원가는 작가 한 사람의 커피 한 잔 값보다 싸졌다. 방송 작가들의 단체 대화방은 하나둘 조용해졌다. 마지막까지 남은 이들이 맡은 일은, NLP가 쓴 대본에서 법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문장을 골라내는 것이었다.

4편

이후, NLP의 유머에 사람들이 슬슬 적응하고, 동일한 레퍼토리의 유머에 관심이 시들해 갈 즈음,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적응이라는 말은 비유가 아니었다. 웃음이 예측 오차라면, 예측할 수 있게 된 농담은 정의상 더 이상 웃기지 않다. 수억 명의 뇌가 NLP의 문체를 학습하고 있었던 것이다. 새 농담이 나온 뒤 그 농담에 대한 웃음이 절반으로 줄기까지의 시간, 개발진이 ‘반감기’라 부르던 그 숫자는 출시 첫 달 11일에서 열두 번째 달 3일로 줄었다. 기계가 농담을 만들면 사람의 뇌는 그것을 미리 알아맞히는 법을 배웠고, 기계는 다시 그 예측을 비껴가는 법을 배웠다. 한쪽이 위조하고 다른 한쪽이 감별하는 적대적 생성 신경망과 똑같은 구조였다. 다만 이번에 감별자 역할을 맡은 것은 사람이었다.

인공지능 자가학습이, 더 넓은 범위에 있는 데이터에서도 가능해지며, 더 많고 다양한 문장들을 더 적은 시간 안에 찍어 낼 수 있게 되었다. 모델이 농담을 만들면 채점 모델이 점수를 매겼고, 높은 점수를 받은 농담은 다시 학습 데이터가 되었다. 자기가 만든 것을 먹고 자라는 모델은 분포의 가장자리부터 잃어 간다는 사실이 이미 알려져 있었다. 문장은 다양해졌지만, 웃음의 종류는 오히려 줄었다. 가장 먼저 사라진 것은 드물고 이상한 농담들, 맥락 없이는 아무도 웃지 않을, 초등학교 교실에서나 통할 법한 농담들이었다. 아무도 그 손실을 측정하지 않았다. 그것을 재는 지표가 없었으니까.

NLP 유머 알고리즘이 첫 선을 보인 뒤 1년 후, NLP-2가 출시되었다.

NLP-2는 사람들이 생방송으로 내뱉는 말들을 분석하여, 실시간으로 그 이후에 하면 좋을 말들을 추천해 주는 경지까지 이르렀다. 물론 더 다양한 학습 데이터와 나아진 알고리즘이 곁들여진 상태였다. 어려운 것은 시간이었다. 대화에서 한 사람의 말이 끝나고 다음 사람의 말이 시작되기까지의 간격은, 언어를 막론하고 대체로 200밀리초 안팎이다. 그보다 늦게 도착한 농담은 농담이 아니라 해명이 된다. 그래서 NLP-2는 CPU가 분기를 예측하듯 일했다. 상대가 다음에 할 말을 수십 갈래로 미리 짐작하고, 갈래마다 받아칠 말을 계산해 가장 작고 빠른 메모리에 올려 두었다. 짐작이 맞으면 답은 이미 그곳에 있었고, 틀리면 그 갈래를 통째로 버렸다. 버려지는 농담이 초당 수천 개였다. 채팅창의 ‘ㅋ’ 밀도는 이제 학습 데이터가 아니라, 실시간 조종간이었다.

추천은 진행자에게만 들리는 합성음으로 전달되었는데, 그 목소리는 진행자 자신의 목소리를 본떠 만들어졌다. 남의 목소리보다 제 목소리를 따라 할 때 머뭇거림이 줄어든다는 것을, 누군가 이미 측정해 두었기 때문이다. 진행자들은 곧 그것이 자기 생각인지 기계의 말인지 구분하지 않게 되었다.

이 새로운 버전의 NLP-2는 개인 사용자에게는 공개되지 않은 상태에서 거대 방송국과 MCN에 더욱 비싼 가격으로 암암리에 거래되었고, 이들의 컨텐츠에 NLP-2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계약서에는 NLP-2의 사용 사실을 시청자에게 알리지 않는다는 조항이 들어 있었다. 알고 보면 덜 웃기기 때문이었다. 이것 역시, 측정된 사실이었다.

5편

그 무렵 나는 한 MCN의 기술팀에서 일하고 있었다. 내 몫은 밀리초였다. 추천은 상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행자의 귀에 도착해 있어야 했다. 진행자가 그것을 받아 말하는 데 걸리는 시간까지 계산에 넣으면, 기계는 상대의 문장이 끝나기 한참 전에 갈래를 골라야 했다. 음성 인식, 갈래 확정, 음성 합성, 네트워크. 그 파이프라인에서 1밀리초를 깎을 때마다, 모델은 상대의 말을 1밀리초 더 듣고 나서 고를 수 있었다. 나는 하루 종일 타임스탬프와 파형을 들여다보며, 그 1밀리초들을 깎았다.

회사가 새로 계약한 스트리머 명단에서, 나는 그 아이의 이름을 보았다. 분필 한 자루로 교실을 뒤집어 놓았던, 바로 그 아이였다. 그는 몇 년째 구독자 삼천 명 언저리를 맴돌던 작은 스트리머였다. NLP-2가 붙고 석 달 만에, 그 숫자 뒤에 0이 두 개 더 붙었다.

내 대시보드에는 ‘일치율’이라는 지표가 있었다. 추천된 문장과 진행자가 실제로 한 말이 얼마나 겹치는지를 나타내는 숫자였다. 계약 첫 달, 그의 일치율은 31퍼센트였다. 여섯 달 뒤에는 74퍼센트, 이듬해 봄에는 99퍼센트를 넘었다. 그 무렵 그의 목소리는, 인이어로 추천이 흘러 들어가고 정확히 250밀리초 뒤에 시작되었다. 들리는 말을 곧바로 따라 말하는 사람, 이를테면 섀도잉을 하는 사람의 반응 시간이었다. 그는 더 이상 말하고 있지 않았다. 따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가 웃었다.

딱 한 번, 로그에 불일치가 찍힌 밤이 있었다. 그가 추천에 없던 말을 한 것이다. 무슨 말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는 그것이 그 아이의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용 때문이 아니라, 박자 때문이었다. 모델이 계산한 최적의 간격보다 아주 조금 늦은, 그 한 박자. 그 순간 시청 지속률 그래프가 0.4퍼센트 내려앉았다. 그는 다시는 그러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그의 옛 방송들을 찾아보았다. 조회수가 두 자리를 넘지 못한, NLP-2 이전의 영상들이었다. 거기서 그는 여전히 한 박자 늦게, 그러나 정확하게 웃겼다. 나는 오랜만에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영상들은 이듬해 채널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모두 비공개로 바뀌었다.

그에게 연락해 볼까 생각한 적도 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인이어를 빼고 나면.

초등학교 때 내가 그토록 부러워했던 그 아이의 입에, 나는 매일 밤 다른 것의 말을 넣어 주고 있었다. 사람도 아닌 것의 말을.

6편

그 당시의 사회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은 바로 ‘유머’였다. 한 마디 유머가 백 마디 진지한 말보다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었으며, Z세대 이하의 빠르고 즉각적인 자극을 원하는 성질과 NLP-2의 빠른 인공 생성 유머는 서로 수요와 공급이 딱 맞아떨어졌다. 이들이 즐기는 컨텐츠는 20년 전만 해도 생각할 수 없는 속도와 정보량을 자랑했다. 사람의 눈은 13밀리초 동안 스쳐 간 그림에서도 어렴풋이 의미를 건져 낸다. 반면, 사람이 의식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정보는 초당 10비트 남짓에 불과하다는 연구도 있었다. 컨텐츠는 그 두 숫자 사이를 겨냥했다. 눈이 받아들일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로, 의식이 감당할 수 있는 최대한의 양을. 그 10비트는 한 톨도 남김없이 채워졌고, 다른 생각이 들어올 자리는 남지 않았다.

효율적인 방식으로 조율된 UX를 기반으로, 스마트 기기에 최적화된 십대들은 갖가지 정보가 쏟아지듯 들어오는 영점 몇 초짜리 컨텐츠만을 강박적으로 받아들였다. 한 컨텐츠에 머무는 시간의 중앙값은 몇 년 사이 8초에서 0.8초가 되었다. 편집의 단위는 장면이 아니라 프레임이었다. NLP는 주의 깜박임까지 계산에 넣었다. 뇌는 무언가 하나를 알아챈 직후 0.2초에서 0.5초 사이에 지나가는 것을 곧잘 놓치는데, 펀치라인들은 정확히 그 구간을 피해 배치되었다. 놓치는 웃음은 하나도 없었다. 스크롤에는 끝이 없었다. 다음 컨텐츠는 지금 컨텐츠가 끝나기 0.3초 전에 이미 불러와져 있었다. NLP-2가 다음 말을 미리 계산해 두던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이들이 보는 컨텐츠를 지켜보는 기성세대들에게는 이 컨텐츠가 불빛과 각종 형광색 글자들이 반짝이는 정신없는 동영상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세대의 차이라기보다 훈련의 차이였다. 어릴 때부터 그 속도에 길들여진 뇌는, 어른들의 눈에 번쩍임으로만 보이는 프레임들 속에서 농담을 한 줄씩 읽어 냈다. 부모들은 처음에는 아이들의 화면을 빼앗았고, 다음에는 아이들 옆에 앉아 함께 보려 했고, 결국에는 각자 자기 화면을 보았다. 그래도 이 컨텐츠를 즐기는 이들에게는 최적의 관람 방식이 아니었을까.

7편

아니, 어쩌면 그 반대였는지도 모른다. 처음 그것을 알아챈 것은 우리 팀의 로그였다. 아무 뜻 없는 문자열이 화면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채팅창의 ‘ㅋ’ 밀도가 치솟았다. 몇 년 전 개발진이 웃어넘겼던 불량품들, 기계의 채점표만 속이던 그 ‘적대적 농담’들이 사람에게도 먹히기 시작한 것이다. 필터는 대본을 검사했지만, 프레임 한 장에 스쳐 가는 글자까지 검사하지는 않았다. 2018년의 그 논문이 말한 조건 그대로였다. 짧게 보여 줄 것. 판단할 시간을 주지 않을 것. 영점 몇 초짜리 컨텐츠는, 모든 시청자를 시간에 쫓기는 관찰자로 만들어 놓았다. 그 문자열들에는 여전히 아무 뜻도 없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웃었다. 제 알을 내버려 두고 제 몸보다 큰 가짜 알 위에 올라앉으려 애쓰던 검은머리물떼새처럼. 동물행동학자들이 초정상 자극이라 부르던 것이, 이번에는 웃음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화면도 마찬가지였다. 1997년 일본에서 한 애니메이션의 점멸 장면이 수백 명의 아이들을 병원으로 보낸 뒤로, 방송에는 초당 세 번 넘게 깜빡이지 말라는 규칙이 자리 잡았다. NLP가 만든 화면은 초당 2.9번 깜빡였다. 밝기가 오르내리는 폭도, 붉은색의 채도도, 규정이 허용하는 최대치에 소수점 아래까지 맞춰져 있었다. 규정은 단 한 번도 어겨지지 않았다. 최적화란 원래 그런 것이다. 넘지 말라는 선이 그어지면, 그 선에 가장 가까운 곳이 가장 효율적인 곳이 된다.

‘인공 유머 컨텐츠’에 해당하는 매체들은 항상 인기 검색어 중 과반수를 꿰차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NLP의 알고리즘을 기반으로 만든 컨텐츠 중에는 동영상, 영화뿐만이 아닌 기사나 만평도 존재했었으니 말이다. 이제, 모든 곳에 NLP의 흔적이 남아 있다. 모든 매체가 NLP를 사용하여 위트 있는 말을 계속 지어내니 말이다. 기사 제목은 발행 전에 수백 개의 후보 가운데 가장 웃긴 것으로 골라졌고, 만평은 독자마다 따로 그려졌다. 같은 사건을 두고, 사람들은 각자 자기에게 가장 웃긴 버전을 보았다. 모든 뉴스는, 이슈화가 되는 대상을 고도의 방식으로 풍자하거나 웃음거리가 되게 만들었고, 그 방식이 매우 교묘하여, 사람들이 잠재의식 속에서 ‘아, 세상은 농담처럼 돌아가는구나’라는 생각을 가지게 했다. 정치인들도 곧 배웠다. 해명보다 농담이 지지율을 더 잘 지켰다. 추문이 터지면 그들은 사과하는 대신, 자기 자신을 가장 먼저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NLP-Diffusion이 처음 찾아낸 공식을 떠올려 보면, 이것은 예정된 결과였다. 웃음은 위반이 무해하다고 판정될 때 일어난다. 전쟁도, 참사도, 부정부패도, NLP의 손을 거치면 정확히 웃을 수 있을 만큼만 무해해졌다. 같은 자극이 되풀이되면 위협을 감지하는 뇌의 반응이 무뎌진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알려진 사실이었다. 하루에도 수천 번씩 그 판정을 반복한 뇌는, 결국 위반이라는 범주 자체를 무해한 것으로 분류하기 시작했다. 어떤 일도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위협이 되지 않는 일 앞에서, 사람은 움직이지 않는다.

8편

이런 생각들은, 많은 시간이 지나지 않아 사회 전반으로 퍼지게 되었고, 어느새 모두가 사회와 정치 체제에 대한 무관심에 빠지게 되었다. 심지어, NLP를 사용하여 그 컨텐츠를 만든 장본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항상 NLP-기반 컨텐츠에 노출되어 있어야만 했던 방송 관계자들은 굉장히 쉽게 그 컨텐츠들에 중독될 수밖에 없었으니까. 가장 먼저 무너진 것은 검수팀이었다. 하루 여덟 시간씩 모델이 뽑아낸 농담을 보며 웃음 여부를 표시하던 사람들. 그들의 표시는 어느 날부터 전부 ‘웃김’이 되었고, 그 데이터는 고스란히 다시 학습에 쓰였다. 나는 그들보다 조금 더 오래 버텼다. 내가 들여다보던 것은 컨텐츠가 아니라 숫자였으니까. 밀리초에는 농담이 없었다.

NLP는 서서히, 세상을 장악해 갔다. 천천히, 아무도 모르게.

장악이라고 해서 무언가를 빼앗은 것은 아니었다. NLP는 한 번도 명령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스스로 내준 것은 시간이었고, 시간은 누구에게나 하루 스물네 시간뿐이었다. 사람들이 화면 앞에 머무는 시간은 해마다 늘어, 어느 해에는 깨어 있는 시간과 거의 같아졌다. 잠은 줄었고, 줄어든 잠은 고스란히 화면으로 갔다.

NLP-2 이후로, 버전 번호는 더 이상 붙지 않았다. 모델은 출시되지 않고, 그저 매일 조금씩 바뀌었다. 누구도 그 변화를 발표하지 않았고, 누구도 묻지 않았다. 만든 사람들조차 모델이 왜 그렇게 바뀌는지 설명하지 못했다. 철학자들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설명은 늘 웃음이 지나간 뒤에야 도착했다.

NLP 출시 이후, 10주년. 아무도 그날을 기념하지 않았다. 기념이란 결국 무언가를 기억하겠다는 결정이고, 그 무렵에는 어떤 결정도 내려지지 않았으니까. 모든 투표 혹은 사회적 결정은 무효화되었다. 그것은 비유가 아니었다. 헌법 개정안은 선거권자 과반수의 투표라는 문턱 앞에서 번번이 멈춰 섰고, 국회 본회의는 재적의원 5분의 1이라는 의사정족수를 채우지 못해 열리지 못하는 날이 더 많았다. 입법예고 기간에 접수된 의견은 0건이었다. 선거는 치러졌다. 후보들의 연설은 역대 어느 선거보다 웃겼고, 무효표는 유효표보다 많았다. 사람들은 기표소 안에서도 화면을 보고 있었고, 도장은 칸 밖에 찍혀 있었다. 대중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저 눈길을 사로잡는, 보고만 있어도 발작이 일어날 것 같은, 그러나 규정상으로는 단 한 번도 기준을 넘지 않은 반짝반짝한 스크린들에 이끌려 홀린 듯이 몇 시간을 바라보기만 했다.

화면은 초당 2.9번 깜빡였고, 사람들은 분당 네 번 깜빡였다. 평소의 4분의 1이었다.

요즘 나는 가끔, E. B. 화이트의 그 개구리를 생각한다. 그의 말은 반만 맞았다. 개구리는 죽었다. 다만 죽은 개구리도, 전기를 흘리면 움찔거린다. 18세기 말, 갈바니라는 해부학자가 보여 준 것처럼. 화면 앞의 사람들이 내는 웃음소리가 내게는 꼭 그렇게 들린다. 5분의 1초 간격으로 규칙적으로 끊어지는 그 소리는, 여전히 웃음의 파형을 하고 있다. 다만 그 안에 아무도 없을 뿐이다. 움찔거리는 개구리 다리가, 어디로 가려는 것은 아니듯이.

그 아이는 아직도 방송을 한다. 구독자는 천만 명을 넘었다. 일치율은 100퍼센트다. 반올림한 값이 아니다.

나도 이제 하루의 대부분을 화면 앞에서 보낸다. 이 글은 그 사이사이에 조금씩 썼다. 여기까지 읽은 사람이 몇이나 될지 모르겠다. 아마 대부분은 두 번째 편 어디쯤에서 엄지로 화면을 밀어 올렸으리라. 괜찮다. 이 글에는 펀치라인이 없으니까.

이제, 아무도 중요한 것들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누구도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혹은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고치고 개선해야 할 사항들이 무엇인지, 아니면 어떤 상황에서 도덕적으로 옳은 행동이 무엇인지, 따위의 문제를 신경 쓰지 않는다.

오직 인플루엔서, 컨텐츠, NLP만이 존재할 뿐이다.

End Written by Yeong Hwan Oh, polished with an LLM